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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78 그때, 너는 '그때..' 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때.. 나는 네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어."

 

가까워지다가도 자꾸만 멀어지는 영화 속 두 주인공이 어느 순간 잠시 만나 마주했다. 그리고 여주인공은 말을 연다. 말문을 열면서 동시에 끝을 흐리는,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야 비로소 나올 수 있는 단어를 읊조리면서. 먼지 묻은 일기를 꺼내 보는 듯한 느낌의 '그때' 라는 단어로.

 

많은 고민이 묻어나 보이는 두 글자에 남자는 대답을 않는다. 침묵이 긍정의 의미일지 부정일런진 그도 모른다. 꾹 다문 입술과 복잡해진 머릿속. 어쩌면 그때를 회상할 수도 아니면 저쪽에서 다음 운을 떼기를 기다리는 걸 수도 있고. 그렇게 그저 조용히 서 있을 뿐이다.

 

 

그때 왜 그랬냐고, 질문형으로 물었다면 우물쭈물 뭐라 대답이라도 하겠다만은, 저런 나직한 평서문 앞에선 말 없이 눈치만 보게 될 뿐이다. 속으로 그저 미안해하거나 이제 와서 예전 일 꺼내봐야 뭐하겠냐는 생각을 하면서.

 

많은 고민 끝에 나올 법한 단어다. 한 두 번 생각한 것이 아님직한 어조다. 상대 마저 배려하자는 마음씬지 아니면 본인의 상처를 최소화 할 방어적 태도인지 모를 그 문장엔 체념과 원망 그리고 기대가 얽섞였다.

 

그때, 너는 '그때..' 라며 말문을 열었고,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의 한 장면이었다. 저런 영화 속 이야기가 일상에서도 생각보다 자주 등장한다.

 

첫번째 '그때' 는 기대에서 비롯됐다.

부모님이 아이들에게, 또 스승이 제자에게 주는 내리사랑의 기저에는 사랑과 더불어 기대가 깔려 있다. 커서 내게 잘하리라는 거 말고, 아이가 행복하고 바르고 씩씩하게 자라 주길 바라는 다 퍼주는 듯한 기대감 말야.

꼬마가 성인이 되어 이제는 그 마음 이해하리라 싶을 시기에 직면해서야 술 한 잔 따라 주며 한번쯤 꺼내 보는 '그때' 다. 나 잘 되라는 마음에서 본인도 불편할 이야길 꺼내시는 걸테니 반성의 자세로 받아들이는 게 좋다.

 

두번째 '그때' 는 실망에서 비롯됐다.

이 사람이 이 정도는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나름의 기준치에 미달했을 때. 반대로 지켜주어야 한다는 선은 넘어 섰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가 펼쳐진 순간의 당황스러움은 실망스러움으로 이어진다.

어느 날 친구나 선배가 예전 일을 슬쩍 던져 온다. 나의 잘못이라면 물론 사과하겠다면야, 그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몇 주 전의 그때가 우리 유대의 마지막 순간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뭔가 어색해지기도 하고.. 나름 웃으려면서 꺼내 왔을 말이고 이쪽에서도 실제 기분보다 호들갑을 떨면서 받아 냈다지만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눈치 보는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세번째 '그때' 는 체념에서 비롯됐다.

쌓인 감정이 역치를 넘어 서면 더 이상은 힘들다는 결론이 선다. 이건 어떻게 할 수가 없다며,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할 즈음 고려하는 관계 대괄호 닫기. 혹은 시도하는 자체가 겁이 나 빨리 마무리 짓는 소괄호일 수도 있고. 많은 고민과 가정을 수반한 마지막으로 훌훌 털어버리자는 방점으로서의 '그때' 이니 결국엔 단념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야구는 삼진 아웃이고 내기는 삼세판, 영화는 3부작 트릴로지(Trilogy) 로 막을 내린다. 그리고 대화는 기대에서 실망감으로 그리고 체념까지 세 번의 '그때' 로 이어졌다.

 

말을 꺼내기 전부터 풍겨 오는 특유의 분위기와 곧이어 나올 두글자는 어떤 일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예상케 한다. 그러면서도 짐짓 듣고 나서야 알았다는 것처럼 반응을 하게 되는 것도 늘 같다. 각자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 이야기의 주제와 전개가 결정되겠지만은, 공통점이 있다. '그 말' 만은 아니기를 바라지만 이럴 때의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거.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는 '그때' 라는 단어는 알아온 시간을 유대감으로 제곱한 무게라고 하고 싶다. 준비 되지 않은 채 받아 내긴 참 버거운. 그치만 짧으면 몇 일/몇 주, 길면 몇 년이나 그걸 감당하며 품어왔을 사람을 생각하면 잠자코 손을 벌릴 수 밖에 없다.   

 

그때, 너는 '그때..' 라며 말문을 흐렸고, 나는 결과를 알면서도 그냥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