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는 퇴근길에 종종 뭔가를 사오셨었다.
"애들아, 아빠 왔다~" 하시며 들어오시면 초등학교 저학년인 나와 유치원생 동생은 잠옷 바람으로 뛰어 나왔다. 볼 뽀뽀 두어 번으로 기분 좋게 내미시는 묵직한 비닐 봉투 안에는 후라이드와 양념 치킨이 한마리씩 들어 있었다. 우리는 방금 자다 깼단 사실도 잊고 얼굴에 양념을 묻혀 가며 먹어 댔었다. 치킨은 늘 옳다는 믿음과 1인 1닭의 개념은 이때부터였나 보다.
아빠의 퇴근길 선물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었으니 저녁 10시 이후, 약주 한 잔하신 후, 그리고 메뉴는 보통 치킨/족발/보쌈 느낌으로. 그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자주 들고 오셨던 건 대부분 안주류 였던 것 같다 ㅎㅎ 나나 동생이나 고기파라서 좋다고 먹었지만 묘하게 맵고 짠 맛이 강해 요구르트를 찾게 하던 그것들은 사실 맥주를 부르는 친구들이었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턴 아버지의 귀가를 내 방에서 맞이 했다. 아니, 맞았다기 보다도 그저 서로의 위치 정도만 확인하는 형식적인 움직임이었다랄까? 현관까지 충분히 들릴만한 "다녀오셨습니까." 란 인삿말과 함께. 아버지께서 되려 내 쪽으로 오셔서 인사를 건네셨으며 나와서 이것 좀 먹어보라며 종이 봉투를 흔드셨지만 그때의 나는 굉장히 무례하고 쌀쌀 맞은 느낌의 "네" 라는 짧은 대답만 했을 뿐이었다. 건넛방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더 이상 뛰쳐 나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봉투 안에 가득 들어 있던 건 치킨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과 마음이었다. 추운 날 식을까봐 품에 꼭 안고 오셨을 봉투는 아무도 나오지 않은 식탁에서 차갑게 식어갔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는 그 뒤 퇴근길에서도 종종 뭔가를 손에 들고 들어 오셨다. 그리고 나와 동생을 찾으셨고 식탁에 앉아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행복해 하셨다.
그때만 생각하면 죄송스럽기만 하다. 부모님이 고생하시고 들어오시면 나와서 맞는 것이 아들 딸의 도리이거늘. 인사 대신 회초리로 좀 맞았어야 정신 차렸을 텐데 싶기도 하고.. 이래서 여의도 공원 벤치에서 팩소주 드시던 할아버지들은 자식 새끼 키워봐야 아무 소용 없다셨나 보다.
시간이 흘러 직장인이 된 내가 처음 집에 뭔가를 사간 날은 2년 전이었던 것 같다.
퇴근 후 회사 선배와 골뱅이 소면에 맥주 딱 한 잔만 하고 집 가는 길에 본 대왕 카스테라 집. 부모님은 별로 안 좋아하실 스타일의 디저트였다만 어느새 하나 사고 있었다. 왠지 엄마 아빠는 아직 모르실 것 같기도 했고, 유행이라니깐 한 번 맛 보여 드리고 싶어서.
돈도 없을 텐데 뭘 이런 걸 다 사왔냐는 어머니와(나도 일단은 월급이란 이름의 쥐꼬리를 받긴 해^^), 기름지기만 하고 별 맛 없다시면서 이미 반 정도는 드신 아버지는 모두 웃는 얼굴이셨다. 이젠 모임이나 회사에서 혹시나 이 카스테라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궁금해 하시거나 괜히 부러워 하실 일도 없으실 거다.
저녁 9시 30분, 맥주 500cc 한 잔으로 딱 알맞은 나른함을 느끼며 집에 가는 내 손에서 달랑대는 카스테라 봉지. 그리고 뜻밖의 소소한 선물로 즐거워 하실 부모님을 생각하며 더 행복해지는 나. 20년 전 아빠의 그 귀가길을 이젠 내가 걸어간다.
부모님께선 어딜 가시든 빈 손으로 돌아오신 날이 없으셨다. 오시거든 나와 동생을 불러 자그마한 것이라도 꼭 손에 쥐어 주셨는데, 엄마 아빠가 여행지나 출장지에서 느끼셨을 그 순간을 공유 받는 느낌이 참 좋았다. 어디 다녀오면 비싼 건 아니더라도 뭔가를 갖고 돌아오는 습관은 어린 날의 기억에서부터 시작됐을거다.
시간이 흘러 나도 뭔가를 챙겨주고 싶은 사람을 만난 적 있었던 것 같다.
외국 출장지에서 주어진 자유시간을 누군가의 선물 고르는데 몽땅 쓴 날이 있었다. 회사 행사가 열리는 호텔 베이커리에서 파는 마카롱이 너무 맛있어 보여 홀린 듯 집은 적도 있었다. 나는 단 걸 잘 먹지 않지만 마카롱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었으니깐. 회식 장소에서 고기를 따로 주문해서 포장해 간적도 있었을 거다. 내게 맛있었던만큼 맛보여 주고 싶어서.
뭔가가 든 봉지를 흔들면서 나는 듯이 걷던 시간이 있었다. 부모님 드릴 대왕 카스테라를 들고 걷던 이후로 그리 즐거웠던 귀가날이 또 있었을까 싶다. 서로의 퇴근길로 이어진 소박한 행복감에 몸서리치던 나날이었다.
각자의 퇴근길만을 걷게 된 지금도 가끔 그 생각이 난다는 건 분명 좋은 추억이었기 때문일거야.
아버지께선 퇴근길에 종종 뭔가를 사오셨었다.
어머니께선 귀갓길에 종종 뭔가를 사오셨었다.
그리고 그 예쁜 마음은 이젠 나의 퇴근길로까지 이어진다.
좋은 것을 볼 때 같이 봤음 하고 맛있는 걸 먹을 때 함께 먹었으면 싶은, 행복한 순간을 공유하고 싶어지는 대상은 소중한 사람이란다. 부모님께는 그게 나와 동생, 우리 가족이었던 거고.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랐다는 점에서 정말 감사드린다.
사랑 받고 자랐기에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니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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