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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75 우리는 야유회를 했다

면바지 대신 체육복을 입고 현관 앞에 섰다. 회사 야유회 날이다. 모자를 챙겨야 하려나 3초 정도 고민하다 그냥 문을 열었다. 근처에 사는 팀원들을 만났다. 모두가 평소보다 편한 옷차림이었다. 가을의 어느 날씨 좋은 금요일, 우리는 여의도가 아닌 양재 방향으로 출근했다.

 

올해 야유회는 운동회로 정해졌다. 그냥도 아니고, 자그마치 '명랑 운동회'. 나이 먹고 뭔 명랑이냐며 코웃음 치며 들어간 잔디 구장에는 추억의 물품들이 깔려 있었다.

훌라후프와 배턴(바통)이라는 고대의 유물 옆은 어디서 구했나 싶은 굵직한 줄다리기 밧줄이다. 조금 얇아보이는 건 단체 줄넘기용이지 싶고. 나는 1팀, 빨간색 조끼를 받았다. 역시 고등학교 축구 경기 이후 처음 본 망사로 된 스포츠 조끼. 세탁은 된 건지 궁금했으나 차라리 모르는게 약이다 싶어 바로 걸쳤다.

 

 

출석 체크를 하고 배정된 그룹 천막을 찾아 두리번 댔다. 아는 사람이 많이 없다. 어디든 끼여 앉아야 한다. 그나마 안면이 있는 쪽으로 가 속으론 능글 맞게 인사를 하고 앉았다. 내가 불편한 만큼 저쪽도 불편할테니 묻고 따블로 가려면 더 크고 더 밝게 인사해야만 한다. "안녕하세요!!!!!!!! 여기 계셨네요~~"

 

볕 잘 드는 창가에 앉아 명란젓에다 참기름 비빈 밥을 앙~ 떠먹고 싶은 날에 명란 대신 명랑을 명 받았다. 같은 날 같은 이름으로 옆 본부 동기도 야유회를 가졌단다. 왜 회사 야유회는 체육대회이며 꼭 명랑이란 명칭으로 대동단결인건지.

 

 

 

 

 

뭉쳐야 뭘 한다는 어느 TV 프로그램의 제목을 카피한 다소 심심한 슬로건을 내걸고 2019년도 가을 야유회는 시작됐다.

 

체육 대회니 만큼 운동 패션 구경이 쏠쏠하다. 상/하의 브랜드가 다른 체육복을 입은 보통의 사람들 사이로 등산 혹은 골프웨어를 걸친 분들은 최소 차장 급이다. 간간이 보이는 청바지나 면바지 차림들은 설렁설렁 대충하고 가겠다는 부류일거고. 그와중에 나이키 티셔츠, 나이키 바지, 신발도 양말도 심지어 무릎 보호대까지 나이키로 무장한 Nike Boy 까지.

 

개회를 십 여 분쯤 앞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선 수다들이 한창이다. 평소 같으면 말 없이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을 시간이지만 이날 만큼은 왁자지껄한 것이 야유회를 실감케 한다. 턱 괴고 삐딱하게 앉아 있어도 눈치 보이지 않는다. 대놓고 웹툰을 봐도 괜찮다. 오늘 만큼은 키보드도 마우스도 아닌 오렌지 주스에 간식이 손에 잡히니 소소한 행복감 추가요~

 

타 부서 분들과 앉은 덕에 딱히 할 말도 없어 출석 등록을 할 때 받아든 런치 박스를 열었다. 서로 근황을 묻는 정도의 스몰 토크 후엔 또 정적이 흘렀으니 어제보단 친해졌음에 만족하며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어색한 질문을 주고 받지 않으려면 입에 음식이라도 계속 채워 넣어야 한다. 과일에다 탄산음료로 입가심까지 하며 애매한 그 시간을 잘도 때웠다.

 

 

사회자가 모두 운동장으로 나오시란다. 행사 전에 팀장님께서 사회자로 나를 추천한다시길래 부담스러웠는데 다행히 전문 MC를 섭외했단다. 그렇죠, 조기 축구회 야유회도 아닌데요. 개 같이 벌었으니 우리 정승 같이도 써봅시다..^▽^

 

댄스곡을 배경으로 단체 게임이 진행됐다. 신입사원 연수 때도 그룹당 한 명씩 있던 열정맨들은 우리의 휴식과 빠른 과제 종료를 막는 공공의 적이었다. 역시나 회사 체육대회에서도 이기려는 플레이는 미덕이 아니다. 섣불리 열심히 하다간 들려오는 볼멘소리의 표적이 되고 만다.

그렇다고 너무 약삭 빠르게 설렁 대는 사원급은 은근한 눈총을 받으니 눈치껏 완급 조절은 필수다. 딱 반 발짝만 앞선 어설픈 의욕으로 웃음 주며 활약하는 우리의 나이키 보이를 보라~

 

준비 운동을 하며 승패 보단 다치지 않는 걸 1순위로 삼쟀다. 이겨야지 뭔소리냐며 말 안 듣던 나는 결국 뛰다가 넘어졌다. 6개월 위 선배도 달리기하다가 미끄러졌다. 축구 선수들이 툭하면 쓰러진다며 뭐라 그랬었는데, 막상 뛰어보니 잔디 위는 정말 미끄러웠다. 우리는 한 쪽 다리를 잃었고 역시 회사에선 가만히 앉아 있는게 상책이란 교훈을 얻었다..

 

10월의 맑은 날 우리는 야유회를 가졌다. 친구들은 아직도 그런 걸 하는 회사가 있냐며 기겁을 했다. (너넨 대체 어디 다니는 거니??!) 개선 되는 추이를 보인다만 여전히 기업 문화 시계는 산업 고도화기에 멈춰 있는 듯 하다. 으쌰 대며 이어 달리고 공을 굴리며 흘리는 땀이 매출 신장과 조직 활성화의 윤활유로 정말로 작용하던 그 때 그 시절에.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가고 귀뚜라미 보일러도 거꾸로 타는 와중에 야유회 문화는 그나마 멈춰 있는 건 다행이려나?

 

나 역시 맘 속으론 친구의 의견에 동조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래도 하루 쉬는 거니까 좋다 / 다들 하는 거 아니냐, 살짝 회사 편을 들었다. 그 곳의 일원인 나를 변호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3년 반 간 미운정이나마 든 건지 모르겠다만.

#기성사원의길 #애사심 #명퇴까지존버 #사랑해요OO

 

 

우리는 야유회를 했다. 우리는 야유회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직원에게 선택권은 없다. 아니, 상무 전무급까지는 호각 부는 소리에 맞춰 목장갑을 얼른 끼고 영차영차 줄을 당겨야 한다.

 

우리는 야유회를 해야 한다. 면바지 대신 체육복을 입었더라지만, 사무실 대신 운동장에 섰지만은, 주변은 죄다 직장 사람들에다 회사 시곗 바늘은 흘러가고 있으니깐. 그래도 사무실에서 쭈구리고 있는 것보단 상쾌하니 좋은 걸거다. 딱 좋은 시간대에 햇볕도 쬐며 비타민D 합성도 가능하니까 건강에도 이득일거다.

 

우리는 야유회를 했고, 근무시간에 공식적으로 운동을 하니 너무 좋다며 눈만 웃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