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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76 생채기가 겁나기 시작했다

노트를 넘기다 손가락을 베였다. 11개월은 족히 넘겨 온 업무 수첩이라 모서리가 꽤 무뎌졌을 만도 한데. 집이었다면 따갑다며 괜한 비명이라도 질러봤겠지만 회사인 관계로 조용히 꾹 눌러 지혈을 했다. 서랍에서 소독약을 꺼냈고 새 살이 솔솔 돋게 해준다는 연고로 마무리 했다. 손톱 만한 조그만 상처가 찬기운에 조금 더 아려왔다.

 

힘이 줄어든 건지 피부가 약해진 건지 크고 작게 다치는 일이 부쩍 늘어났다. 한 번 난 상처는 잘 아물지 않기 시작했다. 전날 야근이나 격한 음주를 하고 나면 슬며시 두통이 찾아오거나 목 안이 간질간질 아파온다. 자연스레 회사 서랍엔 서너 종류의 상비약을 놓아 두게 됐다. 신입사원 시절, 아니 작년까지만 해도 생각 못할 일.

 

 

대학 자취생 시절 부모님과의 전화 통화 시작과 끝은 혹 아픈 데는 없는지 안부를 묻기였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늘 하시던 멘트가 있었다.

"해열제나 기초 감기약 하나씩은 늘 집에 사두도록 해라."

 

당시엔 그게 참 쓸데없는 걱정이신 것 같아 웃어 넘기듯 받아쳤었다.

"아, 그런 거 필요 없다니깐~ 괜히 사러 가는거만 번거롭고 안 먹어요~ 안 아파, 잘 안 아파!"

 

혼자 살면서 뜻 밖의 사고로 다치거나 아파본 뒤로는, 그리고 전보다 몸의 회복이 더뎌졌단 사실을 알게 된 후로부터는 비상약을 꼭 챙겨두게 됐다.

 

 

 

 

 

"우리 이제 절대 아프면 안 되는 나이야."

동갑내기 친구들과의 신년회에서 처음으로 나온 말. 별 차이 있겠냐며 올 한 해도 건강하자는 뜻이겠거니, 웃으며 소맥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컨디션이 예전 같지 않은 걸 조금씩 체감하던 중이었지만 친구놈들의 말이 뇌리에 남은 영향 때문이리라 싶었다. 계절이 변하는 환절기에 당도해서야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마시는 술의 절대량은 전년비 축소되었다지만 신체 컨디션도 그만큼 하락해 겨우 작년 수준에 수렴 중이다. 회사 실적에 이어 건강 마저도 역신장만 막기에 급급한 상황이 꽤 웃프다.

 

아마 올 봄의 시작점이었을거다.

해외 법인과의 회의를 위해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도 스킵하고 뛰어 나갔다. 봄 코트론 아직까진 쌀쌀한, 절로 움츠러드는 날씨였지만 시간을 맞추려 걸음을 재촉했다. 날은 추운데 체온은 올라가니 겉옷을 벗으며 걸어가다 도착해선 아에 반팔 차림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오후 세시가 되자 머리가 조금씩 지끈댔다. 좀 두면 낫겠지, 또 약 사러 가기도 귀찮아 참다가 관자놀이가 아파오는 지경이 이르러서야 약국으로 향했다. 퇴근 후엔 일전에 신청해 둔 세미나 참석을 위해 강남으로 이동했다. 혹시 몰라 출발 전 약을 두 알 더 먹었었지만 계속된 두통에다 정신이 멍해지기까지 해서 중간에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기다시피 도착한 집 앞 편의점에서 산 타이레놀을 입 안에 밀어 넣곤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시간은 다시 흘러 가을로 넘어가는 환절기가 됐다.

일출이 늦어지는 정도에 맞춰 기상 시간도 더뎌진다. 일교차 속도를 몸이 따라가기 벅차다. 출근한 사람들의 얼굴에 보이는 '피곤' 두 글자를 배경으로 잔기침 소리가 일정한 박자를 맞춘다. 이 시기에 걸리는 감기는 쉽게 낫지 않아 긴 투병 생활로 이어질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체력 저하와 잔병 치레의 계절이다.

 

단 것은 뱉고 쓴 것은 기꺼이 삼키는 나이가 됐다.

비타민부터 오메가3, 눈에 좋다는 루테인, 간에 좋다는 밀크 씨슬은 어지간한 회사원들이 기본 영양제다. 스틱형 홍삼 엑기스를 입에 물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우도 보인다. 면역력 강화에는 프로폴리스, 노니는 또 어디 좋다더라, 크릴 오일이 어쩌구.. 하며 술자리서에서조차 건강 식품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 확실히 우리 상황이 달라지긴 했음을 체감한다.

 

회사 선배들이나 어르신들은 우리를 보면서 젊은 날을 회상하실테고, 다시 우리는 교복 차림의 학생들을 보며 옛날을 그리워 한다. 온종일 축구하고 밤새 게임하고도 거뜬히 새벽에 숙제를 시작하던 인간 병기 시절..

만약 콜록도 아닌 쿨럭이는 기침 사이로 가래 끓는 소리를 자주 만난다면 돌도 씹어 먹던 시기는 이제 떠나 보낸 것이리라. 건강을 신경 써야 하는 나이대에 밀려 올라왔으니 물도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

 

날은 추워지고 몸은 뻣뻣해지니 자잘하게 다치는 일도 많아진다. 서랍에 찧여 움푹 눌린 살이 차오르기까지 꽤 오래 걸리게 됐다. 어디서 생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멍자국은 한 주하고도 반은 지나서야 색이 바랜다. 베인 상처가 붙을 만하면 다시 벌어지는 이유는 내가 너무 활동적이기 때문이겠지?

 

자동차는 고급유 주유에다 예방 점검까지 애지중지면서 건강 관리에 대해선 비교적 관대할 때가 있다. 여전히 자신 있는 청춘이라는 건지. 그 와중에 조그만 상처가 잘 낫지 않는 걸 보면 날씨 탓일지 아니면 먹어가는 나이 때문일지 뒤숭숭해진다.

아직 우린 겁나 젊다며 부딪히는 술 잔 사이로 슬그머니 생채기가 겁이 나기 시작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