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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73 보통의 우리가 카지노에서 지는 이유

시작 전부터 결과를 알 것 같은 때가 있다. 상황이 종료된 후 '내 이럴 줄 알았다' 혀를 끌끌 차는 그런 순간. 

그날 카지노 칩을 사면서도 그랬다.

 

작년에 세 배는 땄다는 회사 동기형의 운빨에 살짝 손을 얹고 라스베가스에 입성했다. 가지고 온 달러 뭉치를 장난감 느낌나는 원색의 칩으로 바꿔 테이블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승부의 예측이 어렵다더라도 최대한 패배 요인을 줄여나가야 한다. 딜러부터 다른 플레이어들을 관찰하고 가장 괜찮아 보이는 테이블 주위를 맴돈다. 사람 생각은 다 비슷하다고, 그런 테이블은 꼭 만석에다 사람도 잘 안빠진다.  

 

결국 다른 테이블에 앉아 첫 룰렛 게임을 시작했다. 가볍게 시작해서 가볍게 첫 50달러를 잃었다. 초심자의 행운 어디 갔니? 자리에 앉기 전부터 왠지 바로 잃을 것 같더라니..

 

 

카지노 좀 다녀봤다는 사람들에게선 본전 치기만 해도 이득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냥 여흥거리로 즐겨야지 돈 따려는 생각으로 달려들었다간 어느새 ATM에서 현금 인출 중인 자신을 보게 된단다. 카지노 게임의 종류만큼 돈을 잃는 이유도 다양하다.

 

룰렛 → 공평해 보이는 함정에 빠져서 다 잃는다.

카드게임 → 좀 한다고 손 대다 다 잃는다.

슬롯머신 → 생각 없이 하다가 다 잃는다.

 

내 손에 잠시 머물렀던 칩은 그간 수많은 다른 나와 감정을 공유해 왔을거다. 오백원 짜리 동전보다 조금 큰 플라스틱 조각에 배어 있을 환희와 절망 사이를 생각하니 살짝 두렵기까지 했다. 내 감정까지 떠안은 칩은 떠나갔고 보통의 우리가 카지노에서 돈을 잃는 이유만 남았다.

 

 

 

 

 

시작은 게임이지만 그 끝은 실제리라.

블랙잭 테이블의 눈이 벌개진 신사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이자 놓여 있던 카드 배열도 흔들린다. 바카라 구간의 대학생들은 칩 대신 맥주를 들었다. 누군가 따고 잃는 판국을 관전하며 마냥 환호한다. 자기 일이 아니니깐.

우리가 서 있는 룰렛존에서는 동남아시아 계열의 여성 플레이어가 활약 중이다. 가득히 무리지어 탑을 이룬 칩이 분식집에 말아둔 김밥 10줄 분은 족히 되어 보인다.

 

"묻고 더블로 가!"

 

다른 사람들이 한 번에 3~4개 정도의 칩을 배팅할 때 김밥이모는 10개는 기본이다. 땄다고 딜러에게 던져주는 김밥.. 아니 팁 칩 갯수도 여러개다. 별 고민하지 않고 휙휙 올려두는 것중에 한,둘은 꼭 터지는 걸 보니 생각보다 할 만하겠다 싶더라.

 

자리에 앉았고, 50불을 잃는데 정확히 2분 20초 걸렸다. 보던 웹툰을 끄지 않고 뒀길 다행이다^^ 그와중에 김밥이모는 또 몇 배수로 땄다. 괜찮다. 나는 물질적 가치보다 정신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사람이니까.

이후의 게임도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면서 무소유의 정신으로 하루를 마무리 해냈다. 함께 간 동기형은 번뇌에 휩싸여 김밥이모의 배팅을 보랬다.

 

"저 봐~ 판돈 자체가 커야 따는 거라니깐? 가진 돈 자체가 많아야 과감하고 다양하게 배팅할 수 있다니깐? 잔돈으로 굴려봐야 따도 잔돈, 잃으면 아에 쪽박이잖아."

 

"묻고 더블로 가!"

 

 

친구들과 모이면 내 집 마련 이야기가 꼭 나온다. 판돈 자체가 커야한다는 동기형의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가진 돈에다 1~2억만 대출 받아 보태야 한다는 누구와 몇 년간 안쓰고 겨우 1억을 모은 누군가는 아파트를 구매하겠다는 공통의 목표를 갖고 있다. 판돈이 적은 이는 코스를 우회한 새로운 루트에서 돈을 불려와 다시 승부코자 한다. 그렇게 원하는 기업에 취업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스펙을 쌓던 취준생 시절이 비슷하게 되풀이 되고..

 

동전 지갑에서 잔돈 넣고 빼다 보면 묻고 더블로 가버리자 싶을 때가 있다. 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 카지노 특유의 분위기에 휩싸여 마지막에 뭘 묻게 될진 몰라도 지금은 일단 묻고 간다. 시원하게 외친 후의 결과는 대부분 참담하다.

 

"묻고 더블로 가!"

 

테이블에 쌓인 칩이 줄어들수록 게임당 싣는 기도의 진정성은 늘어난다. 줄담배로 담배갑이 텅 빌 때, 촐싹 대는 친구의 얼굴에서 진지함이 비칠 때야 비로소 지금 뭔 짓하고 있나 싶지.

 

티끌은 더블로 가봐야 티끌이라는 월세살이 현실에 보통의 우리는 하는 수 없이 화려한 함정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잔돈을 어떻게 불려 판돈을 키우느냐, 답이 잘 보이지 않는 문제 앞에서.

 

이쯤에서 형에게 담배 하나 찔러주고 와야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