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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74 기찻길 옆 원룸살이 403

오후 6시 언저리가 되자 밀크티가 당겼다.

주전자엔 물을 앉혀 놓고 환기를 시키려 창문을 열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검푸르게 내려오던 하늘은 보라색, 핑크색, 다시 발그레한 주홍빛으로 이어지면서 밤의 시작을 알린다. 영등포 살이 10개월 만에 이곳 노을을 봤다.

 

창가에 턱을 괴고 섰다. 창을 열면 들어오는 열차 소리 때문에 그러지 않았다만 오늘은 조금 더 머물렀다. 동네를 배경으로 떠있는 바닐라 스카이는 낯설지만 익숙했다. 얼마 전 LA에서 본 노을을 YDP에서 보고 있다.

 

영화 <라라랜드>에서 주인공들은 LA 야경을 배경으로 춤을 춘다. 포스터의 그 노을을 찾아 그리피스 천문대 주차장에서 역으로 내려오며 가장 마음에 드는 가로등 앞에 멈췄었다. 하늘색이 조금씩 변하는 걸 관찰한지 30분, 핸드폰 카메라론 담아내긴 힘들었지만 영화의 한 장면을 만났다.

 

 

평소엔 조금만 깜깜해져도 집으로 뛰어 들어간다만 여행지는 해가 져도 여행지다. 저녁밥을 먹을 때쯤 깔리는 노을을 신호로 야경 투어가 다시 시작된다. 인생 사진이니 사진 맛집이니 하는 단어들은 늘 동네를 벗어난 곳에서만 떠오른다. 그러다보니 나도 오늘 영등포 노을을 처음 본 거고.

 

다시 영등포 우리집 창가 앞. 머그잔에 물을 따랐다. 이제 따뜻한 밀크티와 제법 죽이 맞는 날씨다. 땅거미가 곱게 내려앉은 여기가 우리집 앞 골목 어귀가 맞냐며, 한모금 마시며 올려다보는 403호 노을과 엘에이의 썬셋은 같았다.

 

 

 

 

 

쌀쌀해지면서 장롱 속에서 바닥에 깔 카펫을 꺼냈다. 이 곳에서 맞는 첫 가을이다.

회사 통근 시간을 최우선으로 살 동네를 골랐었다. 지하철 역이 20초 거리인 점이 킬링 포인트에다 깨끗하고 관리도 잘되는 오피스텔이었다. 투룸으로 방이 나눠져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TV 크게 틀어 놓고 누워서 맥주나 한 캔 하다 잠들 수 있는 열 평 남짓의 거실이라고 생각하니까 한결 마음에 들었다.

 

오랜만에 다시 내 공간이 생겼다. 빨간 TV 선반 옆엔 하얀색 프레임에 담긴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 '더 큰 첨벙(A Bigger Splash)'을 놓았다. 지금은 장식용이 된 애착 책들이 꽂힌 책장 한 켠엔 리처드 용재 오닐과 클라라 주미 강 사인 CD도 반듯하게. 어머니께서 선물해주신 키만한 검정 스탠드는 어울리는 곳을 찾지 못해 침대 옆에 뒀다. 가끔 키면 따뜻한 주황색 빛이 온 집을 가득 채운다.

 

단촐하지만 아늑한 우리집은 벽을 경계로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이따금씩 얕은 진동이 느껴지는 이곳은 기찻길 옆 집, 정확히 말하면 그 세번째 옆. 앞의 두 집이 방음벽 역할을 해줘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처음 며칠은 잠에 들기도 어려웠지만 이젠 적응됐다. 조용히 책을 읽고 있으면 덜컹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럴 땐 화이트 노이즈가 집중에 도움이 되겠노라고 자기 최면을 건다.

(아니, 근데, 집주인은 이중 창문으로 안 만들고 뭐했데?)

 

 

다시 내 공간이 생기면 작업실처럼 글도 쓰고 요리도 하고 커피도 내려 마시고 야무지게 살아야지 했다. 현실은 식당에서 카페에서 야외에서 먹고 마시고 노는 일상이었다. 여느 자취생의 생활처럼 그렇게 집은 창고에 탈의실에 샤워실에다 수면실로 잠시 머무르는 곳이 되어 버렸고..

 

창문이 크다. 처음 입주했을 땐 눈이나 비가 오는 창 밖 풍경이 꽤 볼 만하겠다 싶었다만, 그 큰 창문을 줄곧 외출 전 날씨 확인 용도로만 이용해 왔다.

 

2주 간의 프로젝트를 끝마친 지난 주말은 온종일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누워만 있다가 심심해져 정리를 시작했다. 먼지도 닦아내고 널부러져 있던 물건들의 위치도 다시 잡고. 마무리로 블라인드를 걷어냈는데, 왠걸? 창문 사이 노을이 빼꼼 고개를 들이 밀고 있었다.

다가가 창틀에 팔을 얹었다. 여기 이렇게 서서 밖을 본 게 얼마만인지. 서울 밤공기가 이리 상쾌했나 싶은 저녁이었다. 기차 지나가는 소리 마저 낭만적이었다.

 

집은 설렘보다는 편안함을 준다. 언제나 그 공간에서 일어나고 샤워를 하고 물도 꺼내 마신다.

집 주변도 마찬가지로 동네 골목에 관심을 가질 때는 편의점에 들릴 때 정도다. 누워도 서도 비슷한 느낌에, 봐도 들어도 특별할 게 없고, 또 만지고 맡아도 달라질 게 없으니 외부에서 자극을 찾게 된다.

그래서 우연히 찾아오는 일상으로부터의 초대는 전에 없이 오감이 깨어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동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골든티켓 같다랄까?

 

 

어릴 적 조그만 내 방은 최고의 놀이터였다. 베게를 모아 비밀 공간을 만들었고 책상 밑은 궁궐이었다. 변함 없어 보였지만 매일이 새로운 무대가 됐다. 침대는 잠을 자는 곳, 책상은 책을 읽는 곳이라고 정의하게 되는 시기가 되면서부터 더 이상 집 안에서 재미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살던 영등포구의 어느 오피스텔 4층에서 나는 노을을 선사 받았다. 이사 온 첫날 저녁부터 이미 내밀어진 꾸러미를 지나쳤다가 이제야 발견한 걸지도 모르겠다. 나즈막한 기차 소리로 리본 묶여진 아주 특별한 선물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