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가 당기는 느낌에 잠에서 깼다.
몸이 밀려 있었다. 옆으로 30도 가량 넘어가 있었다. 자리에 앉아 여권을 주머니에 넣을 때만 해도, 기내식 떠 먹으며 영화 볼 적만 해도 꼿꼿하던 내 상체가 오른쪽으로 쏠려 고정됐다. 영토를 침범한 거대한 어깨죽지가 보인다. 잠도 덜 깬 상태로 어벙벙하게 앉아 있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살짝 밀었다. 안 넘어간다.
이렇게 밀려보는 것도 처음이다. 최근에 어깨 운동을 열심히 못했다 싶더니 아주 그냥 막 밀린다. 농구할 때 몸싸움하던 것처럼 몸에 힘을 뽝 준다. 버텨본다. 내 공간을 다시 확보했다! 잠깐, 이게 기뻐할 일이 아닌데?? 나는 왜 돈을 내고 고문 받고 있는지. 자리에 앉을 때부터 묘하게 긴장감이 들더라니.
또 졸음이 밀려온다. 힘 좀 썼더니 나른하다. 좋다. 이대로 다시 자면 된다. 모두들 안녕~
툭- 툭-
아이씨..
영원히 못 잘 것 같던 몸싸움 한판 이후 또다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지 싶다.
이번엔 어느 뒷골목의 냄새가 솔솔 나길래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 않는데 왼쪽 턱 부근에 뭔가 있다. 잘 보니 정수리다. 아니, 왠 정수리가 내 코 앞에 있는 거야?
다시 봐도 진짜 사람 머리가 얼굴 맡에 와 있다. 그리고 난다. 냄새. 키우던 강아지 정수리 냄새도 굳이 안 맡았었는데.. 이 사람, 여러모로 선을 넘었다.
정수리 냄새 이후 잠도 다 잤다 싶어 자리 불을 켰다. 손톱 만한 전구가 한밤의 비행기에서는 거의 태양이다. 툭 밀어도 꿈쩍 않던 옆자리 아주머니가 눈가를 찌푸리며 몸을 일으킨다. 뜻밖의 태양권으로 의도치 않게 작은 복수를 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방식과 같이, 선을 넘는 자들은 이쪽에서도 선을 넘어줌으로써 막을 수 밖에 없는 건가?
전 좌석에 불이 켜졌다. 앞치마를 입은 승무원들은 기내식을 분주히 준비하고 있었다.
옆자리 아줌마는 인상을 쓰면서 뒤척이기 시작했고 밀린 상태로 굳어 되어 있던 내 몸도 조금씩 움직여졌다. 기회를 틈타 가슴을 쭉 내밀며 옆구리를 좌우로 당겼다. 아침 식사 시간이 이리도 반가웠던 건 템플 스테이에서 오후 5시 저녁 공양을 마치고 잔 이후로 처음이었다.
복수는커녕 고통만 받다가 아침을 맞이했다. 좌석 불을 켰지만 찡그리는 옆사람 얼굴을 보곤 바로 꺼버렸으니깐. 되값아 주는 건 나와 잘 안 맞다. 밀려오는 찝찝함이 되려 신경 쓰여 그냥 호구나 되고 만다. 답답해하던 친구들은 술 한 잔 할 때마다 일장연설을 한다.
"너 임마, 그거, 칼에 찔렸다 싶으면 꾹 참으면 안 된다니깐? 소리라도 빽 질러야 한다니깐? 푹 찔러서 쓱 들어가면 찌른 놈도 계속 찔러 댄다니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당해도 별 말 못하는 나같은 과에겐 중재자가 꼭 필요하다. 분쟁이나 갈등을 조율해주고 조정해주는 그런 사람. 비행기에서 불을 켜 준 스튜어디스 경우는 모처럼 타이밍이 맞은 경우고.
사람 사이의 일은 역시나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그곳에선 선을 넘는 경우가 꽤 보인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고속버스에서 신발을 벗는 상황부터 시작해서 거리에서 시비 걸리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심지어 연락처를 물어보는 사람에게 정중히 거절했다가 되려 욕지거리를 먹는 경우까지.
최근에 후배가 늦은 취업을 했다. 동기들과 한창 어울릴 시기이니만큼 모임도 자주 갖던데, 술이 들어가니 나름의 고충들을 토로 하더란다. 요즘 신입사원들의 고민 1순위는, '선을 넘는 사람들'. 아슬아슬하게 넘을 듯 안 넘어서 애매한 것이 더 문제란다. 불뚝불뚝 올라오는 화는 애꿎은 곳으로 넘어가 장염을 유발한다. 어색한 양복에 구두만큼 이곳에서의 감정 조절도 생소하겠지.
어려서부터 '선'에 대해 들어왔다. 어른들에겐 존칭을 사용해야 한다. 급식을 기다릴 땐 한 줄로 서야 한다. 사회적 규범 준수를 위한 위치와 상황에 맞는 예의범절 등의.
지키지 않았을 경우의 패널티도 몸으로 배웠다. 달리기 할 때 출발선에 똑바로 서지 않으면 실격 처리다. 시험 칠 때 책상 줄을 똑바로 맞추지 않으면 부정행위로 의심 받는다. 그리고 책상 선을 넘어간 내 지우개는 얄짤 없이 짝꿍거다.
신호에 맞춰 손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어린이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차도를 가로지르는 시기가 오면서 그 선은 흐릿해 보이기 시작한다. 행동이 경계선을 넘으면 의식도 덩달아 넘게 된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속담은 이렇게 탄생했나 보다.
밥도 먹어본 놈이 더 잘 먹는다고, 한번 선을 넘으면 열번도 더 넘게 된다. 알면서도 넘게 되는 게 대부분이다. 각자의 위치,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 선을 넘는 것의 위험.
그렇게 선을 넘는 녀석들이 생겨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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