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자잘하게 덜 챙긴 뭔가로 인해 큰 타격을 입기도 한다.
작은 고추가 맵다. 아,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가?
여튼 내게 있어 해외여행의 첫 시작은 목베게를 챙기는 것이었다.
목베게에도 알뜰형부터 기본형, 고급형, 최고급형 등 레벨이 있다. 그래봐야 돈 1~2만원 차이지만 막상 사려면 선뜻 손이 잘 가지 않는다. 그러면서 옆집 초록 앞치마 언니한텐 "티바나 썸머 시트러스 아이스 그린티 벤티로요~" 하겄지.
많은 목베게들이 내 목을 탔고 언제나 별 편안함을 못 느끼며 착륙하곤 했다. 짐짝 하나 늘었다며 애물단지 취급도 하기 일쑤였다. 언젠가의 비행을 통해 그 생각이 바뀌긴 했지만.
다섯 시간 내내 목이 뻐근했던 적이 있다. 짐을 싸던 중 목베게를 집긴 했었다. 그치만 아시아권 나라로 날아가는 비행기에서는 굳이 없어도 되겠다 싶더라.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버스에 조금 더 앉아 있으면 된다 싶었을까? 목 전체를 싸매는 목베게 특유의 답답함도 별로고. 시원하게 옷장에 집어 던졌다.
..
시원하게 잘못 판단했다..
방해 없이 탁 트인 목덜미를 대신 차지한 공기는 왜 이리 힘이 없는가! 죈다며 불편해했던 목베게는 근육 보호와 디스크 예방, 피로도 감소에다 하다못해 졸다 흐르는 침까지 책임지며 남몰래 열일해왔었다. 아아, 꽃이 진 뒤에야 봄이었음을 알았읍니다..
잊지마라. 비행기를 탈 땐 목베게를 챙겨라. 그리고 펜션에 갈 땐 슬리퍼를, 운전을 할 땐 선글라스를 들어라. 손에 꼭 쥐어라. 양말 속 모래 한 알로 인해 일주일을 절뚝거릴 수 있다는 걸 잊지 말고.
물론 목베게를 착용했다고 해서 특출나게 안락해지는 건 또 아니다. 가로, 세로, 폭이 얼마 되지 않는 그 애매한 링에 5kg 에서 7kg 까지 육박하는 머리가 제대로 지탱되기는 쉽지 않다. 헬스장에서 저 무게 덤벨을 한 번 들어올리는 순간 이해가 갈거다.
축구화나 농구화를 신어봐야 날아다닐 순 없었지만 신기 전보단 덜 기어다녔지. 놀러가서 세수하려는데 머리끈이 없을 때, 머리 긴 친구들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때문에 상당히 씻기 번거로워진다. 작은 한 끗이 어떤 판에선 전체를 뒤엎는 결과가 될 수 있다.
대한민국 신입사원 공채의 필수 코스인 '인적성 검사 시험'은 별의 별 것을 다 물어보는 희한한 시험이다. 어떻게 푼지 기억조차 안나는 수 백 개의 질문에 나도 몰랐던 내 성향을 낱낱이 까내려 간다.
'나는 협동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류의 생각은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었다는 자기 암시를 사전에 해놨다. 애매한 회색 분자가 되어 적절한 수준과 빈도로 나를 속이고 그 상태의 나를 다시 한번 속여가며 정신없는 눈치게임을 한다. 보다 유리한 상황을 전개하기 위한 모든 응시자들의 자세. 솔직해 보여야 하지만 너무 솔직해지면 엄한 방향으로 흘러갈수 있으니깐.
그러다보면 결과에 크게 영향을 줄 것 같진 않아 보이는 문제에서 진짜 개인적인 고민을 할 때가 있다.
'나는 대범한 편이다 vs 섬세한 편이다'
'큰 관점에서 vs 꼼꼼히 보는 걸 선호한다'
생각보다 선뜻 대답하기 상당히 어려운 질문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건 대범하면서도 크게 보는 사람들이라지만 내 일상을 나아지게 하는 건 섬세함과 꼼꼼함이다. 상황에 대한 해답을 나누고 쪼개 보면서 변수와 리스크를 줄여나가는 일련의 보험성 활동이랄까?
내 한 몸 건사하면 족하던 대학 생활 후 입사 초기엔 선배들의 디테일함에 놀라게 된다. 그들을 따라 완성한 보고서를 다시 한번 들여다 보고 말하기 전 생각을 곱씹어 보고 있다. 시행착오 리스크를 줄이는 효과적인 방어술을 배우는 셈이다.
대범하다, 대담하다, 호탕하다 류의 단어는 뭔가 멋있다. 글자부터가 사소함에 연연하지 않는 기개를 보여준다랄까? 반대로, 꼼꼼하다는 건 까탈스럽다, 세심하다는 건 쪼잔하다, 섬세하다는 건 유난스럽다라고 느껴진다.
위인전도 영웅이나 장군, 혁명가들의 일화가 재미있고 영화에서도 후방의 전술 회의 씬보단 배수진이나 선봉대의 돌격 장면에 가슴이 두근거리니깐.
곰곰이 생각해보면 저 까탈스럽고도 쪼잔하고 유난스러운 단어는 치밀하고 주도면밀하고 야무지다라고도 해석될 수 있다. 꼼꼼함은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 날카로운 눈썰미다. 여러 경우의 수를 고려해 실수를 최소화하는 효율적인 스킬이다.
간절기 외출시 당장 입진 않더라도 가디건을 하나 챙겨 나가는 사람, 캐리어에 종합 감기약/해열제/진통제/소독약을 굳이 담아 출국하는 사람, 회사 서랍에 작은 우산 하나 넣어 두는 사람. 유난스럽다는 말을 듣지만 결국은 이들이 승리자던 순간, 경험한 적들 있지?
스티브 잡스는 '리스크를 감수하는 사람만이 진짜 예술가' 라고 했으나 평범한 직장인들에게 역시 예술의 길은 멀고 험하다..ㅎㅎ 비행기에 앉아 가방에서 목베게를 꺼낼 때 옆사람의 부러워하는 시선을 즐기는 걸 상상해보면 어떤 경우엔 기꺼이 유난떠는 사람이 되련다.
걱정이 많아도 괜찮아. 소심하다면 더 안정감 있지. 쫌생이들이 의외로 더 잘 살아가더라?
잊지마, 3시간 비행이든 30시간 비행이든 비행기를 탈 때는 목베게를 챙기는 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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