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날을 맞이해 동해로 여행을 갔다. 출발할 때 두어 번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점점 더 추적대더니 올림픽 대로에 오르면서 굵은 빗줄기로 변했다.
와이퍼가 빗방울을 닦아내는 건지 빗물이 와이퍼를 밀어내는 건지 헷갈리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매스컴도 탔다는 속초의 물회집(요즘 TV 안나온 음식점이 없긴 하다만).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만 운영한다는 자신감 넘치는 이 식당을 SNS에서 헤시태그 검색하면 '빨리 안가시면 못드세요~' 란 포스팅이 많았다. 누가 밥 한끼 먹으려 그러냐고 코웃음 치며 정확히 9시 20분에 뛰어 들어갔다.
일찍 간 덕에 기다리지도 않고 널찍한 자리에서 한적하게 식사를 했다. 알맞은 양의 에어컨 바람이 들고 입구, 화장실, 부엌까지도 적절한 거리의 전략적 요충지에 착석했다. 서울에서 속초까지 걸린 시간 2시간 40분. 기상시간은 새벽 5시. 일찍 일어난 사자가 물회를 맛있게 먹는다.
물회집 사례처럼 보물 찾기보다 어려운게 힙(Hip)한 맛집/카페 자리 맡기.
SNS 감성으로 유명하다는 카페는 벽면이나 유리창 한 쪽씩 특유의 '사진 맛집' 아우라를 풍긴다. 나머지는 집 앞 카페랑 별반 차이 없으니 그 곳에 앉아야 한다. 배산임수의 옛 명당은 찾는 것부터가 어려웠다만 요즘 사진 명당은 발견은 쉬우나 쟁취가 어렵다. 카페 안 모두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에 명당 있을지니.
오션뷰로 유명하다는 카페로 이동했다. 이른 시간과 더불어 폭우 때문인지 사람이 더 없었으니 바다가 그림처럼 보이는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져가자 매장에 사람들이 차기 시작했다. 어영부영하다가 벌써 몇 번이나 기회를 놓친 형이 보인다. 슬쩍 가재눈으로 본 여자친구의 표정이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이 타이밍에 영화 <타짜> 한 장면이 겹쳐 보이는 건 우연일지 혹은 필연일런지.
"자, 잠깐, 예림이! 저 놈들 진짜 나쁜 놈들이야. 안에 분위기가 정말 끔찍해, 우리 가자!"
"지금 이 마당에 착한 척 하세요? 여긴 지금 지옥이에요, 이 병신아!"
"이쯤에서 삼촌은 그만하고 바둑 한판 두쇼. 자, 지금부터 선수끼리 화끈하게 놀아봅시다! 어이, 오함마 준비해야 쓰겄다."
호구 아니면 선수인 그대여, 이제 눈치 게임을 시작하지!
적어도 같은 기회를 가졌다면 카페에 들어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편이다. 나비처럼 들어가 벌처럼 빈 자리에 착석한다. 만석일 경우 자체 예약은 필수다.
Step1) 앉아 있는 사람들 음료의 남은 양과 행태를 파악한다.
Step2)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기다린다. 여자친구가 지쳐 화나지 않도록 시간 끄는 건 알아서..
Step3) 그 분들이 나갈 채비 할 때 젠틀하게 다가가 자리에 앉아도 되겠냐고 동의를 구한다.(사실 찐주인은 카페 사장이지만..)
아프리카 부족이 비가 올 때 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것처럼 기다리기만 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 소요시간을 알 수 없긴 하지만.
오션뷰 카페라는 이름에 화답하듯, 여름 비와 바다의 조화 속에서 운치 있는 시간을 보냈다. 슬슬 일어나려 준비하자 2층 전체가 술렁였다. 한 커플이 슬쩍 오더니 가는 거냐고 묻더라. ㅇㅋ 너 가져. 인생은 뭐다? 타이밍!
맛집이나 카페에서 자리를 잡는 것처럼 나름의 '명당'을 찾는 일이 회사에서도 있다.
매해 가을에는 해외 거래선 방한이 예정되어 있다. 다가오는 10월에도 담당 국가인 미국과 캐나다에서 총 십여 개의 유통 바이어들이 한국을 방문하는 일정이 2주간 잡혀있는데, 건건이 업무용 회의실이 필요하다. 비슷한 시기에 중남미 지역, 유럽,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에서까지 현지 바이어들이 방한 회의를 오게 되니 좋은 컨디션의 회의실을 차지하기 위해 팀별로 경쟁을 하게 된다.
일자 별로 선착순 예약을 하게 되어 지난 주부터 나도 팀의 회의실 확보 올킬을 위해 밤 12시 마다 신청 대기하고 있다. 대학생 시절엔 수강신청을 단 한번도 성공한 적 없어서 매번 남들이 버린? 수업을 주워 담곤 했는데 여기선 나의 클릭 속도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 내가 팀에 아무 기여도 하지 않는다며 농담 같은 진담으로 불싸다구를 날리시는 팀장님이 예약 현황 한번 보셨으면 좋겠다^^
하고 나면 별거 아닌 회의실 예약은 실패할 경우 은근 스트레스를 준다. 작년 예약을 담당하던 선배가 아깝게 한두 개 예약을 놓쳤었다는데, 팀장님 이하 선배들의 눈치를 보면서 다른 팀이 여분으로 확보해 놓은 회의실 양도를 부탁해야 하는(그래봐야 절대 안주는 경향이지만) 짜증스러운 일을 겪어야 했단다.
거래선 방한건이 아니더라도 월초, 월말 회의가 잦은 시기에 회의실 잡는건 생각보다 꽤 어렵다. 뭔놈의 회의가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굿 플레이스를 제때 잘 잡아내야 내가 덜 귀찮아지니까 오늘도 해낸다.
과정도 중요하다지만은 식당이나 회사와 같은 이 냉혹한 사회에서는 결과값에 비중을 두는 경우가 훨씬 많다. 명당 잡기도 그렇다. 돌격해 쟁취를 하든, 아니면 이른 시간을 공략하든, 빌리든, 뺏든 방법은 상관없다. 그저 자리를 잡았는가 못 잡았는가, 선수가 되느냐 호구가 되느냐가 중요할 뿐이지.
회사 안에서도 밖에서도 성공해내는 당신의 하루를 응원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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