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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63 그들이 English 를 쓰는 이유

20년 전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아주머니(혹은 아저씨)들이 만났을 때 튀어나오는 영단어들이 있었다. 가령 Negotiation의 줄임말인 '네고'라든지. N, e, g, o 말고도 철자가 일곱 개나 더 들어있는 명사지만 지금까지도 그 단어가 앞 네 자를 넘어 발음된 대화를 들은 적이 없다.

 

어느 날도 그랬다. 학교 선생님 입에서 그 N word 가 튀어나왔다. 이때다 싶어 여쭤봤다. 다들 그냥 쓰기에 쓰신다더라. '네고'와 '협상'은 철자 수도 같고 발음하기에 드는 노력도 비슷한데 왜 굳이 미제 단어를 선호할까?

 

해외사업본부로 옮긴 뒤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쓰는 사람들을 만났다.

 

'Sales들에 매출 collection 강하게 push 하면서 빠르게 deal-making 전개하여 각종 장애 및 risk 요인들 verify하고, 만회 plan 수립 통해 목표 달성에 대한 visibility 확보하겠습니다.'

 

 

참조 걸린 E-mail을 처음 확인하곤 당황+황당했다. 무슨 방탈출 게임 암호도 아니고. 한국말로 그렇게 어려운 문장이 아닌데, 굳이 저렇게 쓰는 이유는 과연 뭘까? 한국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단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insight가 담긴 영단어들도 아니고. 키보드 한/영키를 누르는 노력이 오히려 더 들 것 같은데..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를 몇 달, 이들이 영어를 (과하게) 섞어 쓰는 이유는 나름 해외영업 담당들이라 그렇다거나 영어로 방귀 좀 뀐다는 이유 때문이 아님을 알게 됐다. 멋도 없을 뿐더러 정작 해외법인의 현지인들은 저런 괴문장 못 읽으니깐.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다더니, 네고 아주머니들을 평생 피하고 살았건만 또다른 '그들만의 언어' 를 맞닥뜨리게 됐다.

 

 

 

 

 

경제과 교수님들은 원어로 된 전공서적을 추천하셨었다. 아무리 뛰어난 번역체도 원어 문장만큼 직관적일순 없다면서. 쉽진 않은 전공이었지만 어떤 원서는, 지금 우리 팀장님이 좋아하는 단어를 써서 말하자면, 문장이 정말 clear 해서 읽을 땐 이해가 나름 잘 됐었다. (수업 후엔 거짓말처럼 기억 안 났지만)

 

그런 의미에선 회사 메일엔 굳이 영어가 들어갈 필요가 없다. 문장 하나당 하나씩 들어간 영단어가 과연 어느 정도로 직관성을 선물할지? 내부 사람들끼리만 수건 돌리기 하듯 돌고 도는 메일이기에 이 사이선 나름 clear 하겠지 싶다.

Verify, Visibility, On-track, Progress.. 족보처럼 상용되는 몇 종류 한정된 단어를 넣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토익스피킹 스크립트를 달달 외우는 취준생들이 생각난다.

 

처음으로 써 보낸 보고서는 그들의 워딩으로 뜯어고쳐졌다. 빨간색으로 뒤덮여 너덜너덜하게 되돌아온 장표를 바라봤었다. 이직을 한 것도 아니요, 본부만 바껴도 이렇게 많은 것이 달라진다. 4년차의 회사생활. 이또한 적응의 과정이니라.

 

"너는 언제쯤 팀에 contribution 할 거냐??"

"어떤 value 만들어낼 수 있을지 고민 좀 해봐!!"

싫은 소리를 할 때조차 잉글리시를 적극 활용하는데, 그때마다 등장하는 영단어는 회사동기들 사이 그 달의 키워드가 됐었다.

 

 

주변에 유학생 친구들이 꽤 있다. 미국에서, 또 다른 영미권 국가서 십수 년을 보내고 돌아온 친구들과 대화시엔 자연스럽게 영어가 많이 나오는데, 역시 유학생 출신인 나도 둘 중 하나의 stance를 취한다. 주변 분위기를 보며 고개만 끄덕이던가 아예 포기하고 같이 영어로 떠들던가.

그런 친구들이 내 회사 E-mail을 SSG 보더니 뒤집어진다. 우린 적어도 한 문장 내에 두 언어를 섞어 쓰진 않았었다.

 

그들이 영어를 쓰는 방식, 그리고 그 이유를 이해해보고자 했다.

북미지역의 주 언어는 영어, 거길 담당하는 팀 communication에 영어단어가 자주 나오는건 시장과 일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것이다?? 혹은 본인들도 내키진 않지만 미국 주재원 생활을 오래하신 팀장님의 스타일에 맞춘걸거다?

 

회사마다 팀마다 그안에서만 사용하는 언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입사후 낯섬의 선봉에 있던 그것은 시간이 지나며 소속감 혹은 지루한 일상의 상징이 되어간다.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머리엔 꽃을 꽂은 어떤 선생님은 English는 마음 속에 있는 거랬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 들어온지 반년째, 내가 알던 잉글리시는 마음 속에 담아두고 새로운 언어로 소통하는데 적응중이다.

기계 부품을 바꾸듯 그간 쓰던 단어를 지워낸 빈자리를 이곳만의 표현으로 채워 넣었다. 이 회사 오는 바람에 핸드폰도 바꿨어야 했구만 뭘 못하겠어.

 

우리의 것이라기엔 아직은 어색한, 그들만의 언어가 등장하는 이메일을 다시 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