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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60 가끔은 투정 부리고 싶다

투정을 부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대개 후회한다.

이때 그걸 받아들이게 되는 대상은 친하고도 가깝다는 '내 사람들'이다. 가장 소중한 이들에게 가장 짜증을 내다니, 역설적이지만 그렇게 된다.

공부나 친구 문제 따위로 유쾌하지 않은 날에도 학교에서의 감정 표출은 최대한 자제했었다. 적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지 모를 외부였으니까. 집에 오면 긴장이 느슨해지매 꾸역꾸역 밀어 넣어뒀던 것이 북받쳐오른다. 피곤함이나 배고픔은 뒷전이 되고 혼자 삭힐 시간이 필요해진다. 밥 생각 없다며 꽝 닫아버린 문에서 어머니의 걱정어린 노크 소리가 들릴때 결국 감정에 집어삼켜진다. "아, 안 먹는다고! 필요 없다니깐!!??" 비겁한 변명이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격.

 

 

액션 영화의 주인공은 적들에게 둘러쌓인 절체절명의 순간에 친구 혹은 동료와 등을 맞댄다. 위험을 맞닥뜨렸다고 아무에게나 뒤를 내주면 안된다. 배신자거나 혼자 살아남으려는 겁쟁일수도 있기 때문에. 그래도 일단은 살아야 하니 등을 맞댄다.

내가 주연인 영화에서도 마음에 여력이 없어질때가 있다. 이성보다 감정이 짙어지면 또다른 의미로 등을 맡기고 싶어진다. 일단은 살아야 하니 나만 생각하게 된다. 도와줄 사람을 찾아 일방적으로 기대려 한다. 기댐을 기대하면서, 또 애착이 투정으로 이어지며 어른은 아이가 된다.

시달리고 고달픈 직장인들에겐 그런 순간이 꽤 자주 찾아온다. 그러지 말아야지 싶다만은, 앞에서 어리광이나마 부리고 싶은 당신이 있기에 그새 또 하고 만다. 스트레스에 취약한 일개미들이라면 더욱.

 

 

코감기에 연거푸 재채기할 때 같다랄까? 한껏 투정 부린 뒤엔 후련한 찝찝함이 몰려온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더니 결국 한사람의 고민을 둘 셋이 함께 짊어지게 되는 셈이다. 미안하고 눈치가 보인다. 특히 그 대상이 온종일 자식 걱정이신 어머니라면 죄스럽기까지 하다. 이성은 가혹하게도 늘 한 발씩 늦다.

회사에서 쥐어 터지고 돌아왔다. 서러운 분노를 가득 안고 친구들에게 투정을 부린다. (본인만 모르지만) 질척대며 매달리다보면 건네져오는 그들의 위로의 격(格)이 통 마음에 들질 않을 때가 있다. 이러면 유치하다 싶지만 섭섭함이 밀려오는 건 어쩔수가 없다.

기대보다 시원찮은 그들의 리액션에 툴툴대다 보면 분위기가 삽시간에 애매해진다. 결국에 꼬인 관계를 풀어야하는 건 내 쪽이다. 동의도 없이 않고 기댄건 나고, 저쪽서 굳이 정성스런 위로를 건낼 의무는 애초부터 없었으니깐.

부모님의 내리사랑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남 일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이 보통의 사람이다. 죽고 못사는 너의 술 친구, 차라리 취했을 때가 더 인간적일거다. 옆 사람에 관심을 기울이다보면 그만큼 본인 일을 챙길 여력이 부족해진다. 그래선지 의외의 사람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들을 땐 감동의 쓰나미다. 역으로 형제처럼 믿어온 친구의 형식적인 위로를 듣고 나면 밑바닥까지 허탈해진다.

 

 

기대한 만큼 실망한다. 섭섭함의 크기는 애착의 정도에 비례한다. 서운함이라고 적고 삐짐이라 읽는다. 관계 맺음에 있어 말 없이 토라지는 쪽이 결국 손해다. 어쩌면 내가 위로가 필요한 그 순간에 친구도 중요한 뭔가를 하고 있었을거다. 그쪽도 힘든 하루를 보냈을수도 있다. 부분에 집중하다 보면 전체를 놓치게 된다.

좋아하고도 믿으니깐 투정도 부릴순 있지. 그치만 누군가 그걸 마땅히 감내해야 한다는 건 아냐. 친하되 답례를 기대친 말아야 할거다. 어느날의 관심의 정도를 친분의 척도로 삼진 않기로.

폭풍 투정 후의 현자타임, 어느날 다시 요동치는 마음 그리고 다시금 반성. 진부한 영화만큼 매번 반복되는 시나리오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