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들어 머리에 손이 자주 간다. 정확하게 말하면 정수리 언저리에.
유독 회사에서 자주 그러는데, 보고자료 작성이 막막하다거나 방금 제출한 장표의 데이터가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때?
퇴근을 하고 헬스장으로 향했다. 땀 흘리며 종일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샤워를 하고 나왔다. 머리를 말리는데 바로 옆 헤어드라이기를 누군가 딱 잡더라. 보디빌더st 구릿빛 탄탄한 몸의 30대 후반 언저리로 보이는 아저씨. 아따 형님 머싯네~ 생각하던 와중 그가 고개를 숙였고 안타까운 정수리가 대신 얼굴을 드러냈다. 롤빗으로 머리에 볼륨을 넣는 모습에 너무 세게 당기는 건 아닌지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친구집에 놀러갔다.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탈모샴푸가 있다. 머리에 칙칙 뿌리는 스프레이도 보여주더라. 뭐든 잘먹고 담배도 안피고 심지어 운동까지 규칙적으로 하는 친구까지 그 손아귀에선 벗어날 수 없나보다. 떠들며 노는 와중에 케어제품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이제는 더이상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집에 돌아가는 차안에서 정수리를 만져봤다. 어느정도 수준인지 헷갈리는 질감이다. 폰을 꺼내 검색해봤다. #탈모
출근을 했다. 처음 본사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이상하게 회사 사람들의 머리에는 살색이 많이 보인다.
햇볕이 구석구석 들어오는 오후 2시경엔 하얘진 정수리들이 여럿 보인다. 진실의 순간.
20층은 이미 T신드롬에 지배 당한 상태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기에, 그 꽃이 아름답고 그 열매 성하도다.』
- 용비어천가 제 2장
머리카락 한올 한올이 새삼 소중하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친구들이 굳게 뿌리내려 아름다운 두상 만들기에 이바지해주기를.
정수리를 톡톡 칠때 살갗이 쉽사리 느껴지면 안된다. 뻗어나오는 머리카락의 저항에 의한 쿠셔닝을 우선 맛봐야 한다.
사무실에서 마우스를 클릭하다 무의식적으로 머리에 뻗쳐진 손. 별 신경 쓰지 않은 손가락 끝에 살 특유의 맨들함이 느껴지면 밀려오던 졸음이 확깬다. 다시 만져본 후에야 한숨 돌린다. 아직은 오셔선 안됩니다 선생님..
주위를 둘러보면 어느 한명은 꼭 한손에 휴대용 두피 지압기나 브러쉬를 쥐었다. 몇 천원 짜리부터 몇 십만원까지 하는 이런 탈모관리 제품은 점점 인기가 늘어나고 있다. 정수리를 콕콕 누르면서 과연 어느정도나 효과가 있을지 본인도 의구심을 품겠지만은 그래도 결국 하게 될거다. 예로부터 약장사들이 흥했던 이유가 바로 이런 심리 때문이려나?
탈모샴푸 특유의 향을 썩 내켜하지 않았다. 아직은 한방 느낌의 건강한 향보단 달달한 향이 끌리게 마련. 언젠가 어머니께서 모발케어 샴푸를 하나 주셨었다. 그땐 '나 이런거 필요없어~' 했었는데 오늘은 서랍을 뒤져 그 비밀병기를 손에 쥐었다. 때가 된듯하다.
콩을 안 좋아한다. 콩밥은 늘 패스했다. 검정콩이 탈모 예방에 좋다는 말을 듣고부턴 찾아먹기 시작했다. 여전히 맛은 없지만 꿀떡꿀떡 삼키기라도 한다. 먹고 안먹고 나름 작은 차이겠지만 왠지 그 한끗으로 결판날 것 같은 느낌?
운이 나쁘면 바로 아랫대에, 혹은 대를 건너뛰며 발생한다는 탈모.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머리숱은 나를 한번의 인생고비에서 구하신 셈이다.
유전성 탈모는 그나마 미리 알고 대처나 최소한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다.
정작 통수를 후려치는건 스트레스성이다. 중학생 시절, 성적 스트레스로 원형탈모가 생겼다는 옆 고등학교 어느 누나의 소문을 들으며 놀랐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그건 바로 주변의 이야기가 되었다. 영업과 같이 경쟁과 실적 압박이 높은 직무에는 그 비율이 확연히 높더라.
"사자씨도 머리숱이 많네요?"
"근데 얘네 점점 얇아져가는 것 같아요. 자꾸 만져보게 되더라구요."
"헐.. 벌써부터 그러면 안될텐데.."
직장인들은 스트레스에 전방위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돌발사고가 터지거나 실적이 나빠지면 일이 늘어난다. 대책회의를 위해 출근시간은 당겨지고 사유보고 작성으로 퇴근시간은 미뤄진다. 당연히 팀 분위기도 최악이다.
내일도 또 이럴걸 생각하면 숨이 막혀오고 그와중에 월급은 그대로다. 팀장이 호통을 치고 사수가 짜증을 낸다. 머리에 스멀스멀 열감이 올라온다.
철저한 조직사회이자 계급사회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우님들이 늘어나고 있다. 배가 아프고 머리가 지끈대고 정수리가 옅어짐에 신음한다. 어떤 병이든 퇴사를 하면 낫는다는 '퇴라피'라는 말이 괜히 나왔을까봐? 열 받지 말자, 내 머리숱은 회사일보다 소중하니까.
지난달 실적이 곤두박질치며 며칠간 또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쳤다. 늦은밤 퇴근해 머리를 감는데 이상하게 손에 털이 많이 묻어나온다. 근래들어 배수구에 낀 머리카락을 치우는 횟수가 잦아진 것 같다. 출퇴근길 가로수마저 휑해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머리 나는덴 순서 있어도 빠지는덴 순서 없음을 몸소 느끼고 있다.
어떻게, 정수리는 안녕하신가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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