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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65 커피를 안 좋아합니다만

회사 로비로 입장한 시간 오전 7시 3분. 아침 회의 시작은 7시 30분이니까 15분 전에는 들어가야 한다고 쳐도 10분 정도 시간이 남는다. 지체 없이 지하 1층 카페로 내려간다. 빠르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레귤러로 하나요!" 를 외치고 받자마자 한 입 빨아 당긴다. 묵직하면서도 쌉쌀한, 아침을 여는 그 맛이다.

 

화요일 아침 7시 30분 부터 시작되는 미국 지사와의 주간 회의는 일주일 중 손꼽히는 고난의 시간이다. 정식 출근 시간은 오전 8시 30분인데 추가 근무 수당도 없이 희생하는 부분은 제쳐두고, 일단 회의 시간 자체가 너무 이르다. 행여 늦잠 잘까봐 새벽에 몇 번은 깨는 등 잠을 깊이 자지 못한다. 그렇게 평소보다 건조해진 눈은 의지와 무관하게 깜박인다.

 

 

짧으면 1시간 30분에서 최대 3시간까지 지속되는 회의는 휴식 한 번 없이 이어진다. 아침 못 먹고 온 덕에 몰려드는 허기와 에어컨 바람에 심화된 안구 건조증의 콜라보 효과로 졸음이 발동된다. 본능과 의지 사이 전투의 시작.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가자는 팀장님의 목소리를 등대 삼아 마지막 한 줄기 정신을 부여잡는다. 커피를 마셔야 한다.. 시야가 반으로 줄어들다 다시 확장되면서 검은 플라스틱 컵이 보인다.  

 

어릴 적 드라마에서 회사원들은 늘 커피 자판기 앞에서 만담을 나누고 있었다. 왜 저렇게 커피 뽑는 장면이 많이 나오나 했는데, 시간이 흘러 같은 신세가 되고 나니 알겠다. 커피 마시는 시간에 비로소 숨 한 번 돌린다. 이거라도 마셔야 살 것 같다. 사무실의 생명수요, 인생의 쓴 맛을 비로소 알게 됐다 랄까?

 

 

 

 

 

커피를 그다지 즐기진 않는다. 마시면 속도 더부룩하고 배도 살살 아파와 카페를 가면 늘 커피 이외 음료를 주문했었다. 제작년 영국 여행을 다녀오면서부터는 차에 빠지게 되며 커피와는 한층 더 벽이 생겼다.

 

그러던 올해 초 해외사업부로 옮기게 되면서 새로운 판국이 펼쳐졌다. 돌잡이하는 애기 마냥 찻잔은 밀쳐두고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잡았다.

 

이곳은 유난히 조용하다. 졸리다. 가끔 (요즘은 꽤 자주) 들려오는 부사장님 고함소리를 빼면 고요한 분위기에 종종 무섭기까지 하다. 종종 졸림이 밀려오다 깨면 그 적막함에 놀라 슬며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정신을 잃기 전 몰래 보던 좀비 웹툰처럼 여기도 뭔 일이 생겨서 조용한가 싶어서. 구매팀에 피씨방에서 쓰는 타탁거리는 자판음의 기계식 키보드라도 보급해달라 해야 하나? 조용하다 보니 바쁘지 않을 때는 정신줄이 느슨해지는데 늦지 않게끔 커피를 마셔줘야 한다.

 

회의가 유달리 많다. 졸리다. 군인이 전쟁터에 총을 매고 가듯 직장인은 커피잔을 들어야 한다. 전쟁터나 회사나 아무도 내 목숨을 챙겨주진 않는다는 점에선 같다. 만약 커피를 잊었다면 랩탑 충전기 또한 잊었음에 감사해야 한다.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순간엔 충전기 좀 가져오겠다며 회의실 밖을 나가 커피머신에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내려 그자리서 원샷 한다. 어떤 원두를 쓰는진 몰라도 거의 한약 마시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덜 졸리는 거 보면 확실히 효과는 있는 듯 하다.

커피 마시기가 아예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팔뚝부터 허벅지, 오금, 심지어 목덜미까지 꼬집은 자국으로 발갛다. 나의 피부마저 지켜주는 신비의 음료였다.

 

 

6~7세기 경 최초로 발견되었다고 알려진 커피 열매는 먹은 사람이나 동물의 기력을 회복시켰다는 기원을 가지고 있다. 천 년하고도 수백 년의 시간을 넘어 21세기의 직장인들의 에너지원이 되고 있다는 점, 리스펙.

 

아직까지도 커피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 카페에 가도 여름에는 주스 류를, 겨울에는 차 종류를 우선 살핀다. 커피는 회의 전이나 졸릴 때 혹은 컨디션이 안 좋아 억지로 몸을 지탱해야 하는 날에야 선택하게 되는 최후의 보루다.

며칠 전에 사수가 팀원들 커피를 사오면서 내꺼라며 딸기주스를 건네더라. 고맙기도 하면서 조직 생활 중에 내가 너무 유난떠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자유로움을 지향하는 나 조차 코리안 직딩 마인드에 젖어 가는가.

 

"커피 한 잔 하자" 며 말하는 건 면담이나 이야기를 하자는 제안이거나 잠시 휴식을 갖자는 선택이지만 '커피 한 잔 해야겠다' 는 마음의 소리는 생존을 위한 본능이다. 이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반드시 큰 일이 나고 만다. 존다던지, 잔다던지, 정신을 잃는다던지.

 

커피를 마신다. 이거라도 안 마시면 죽을 것 같아 마시는 커피다. 내일의 집중력을 오늘 끌어쓰겠다는 의지로 들이키게 되는 커피다. 뒷일은 모르겠고 지금만 살고 보자며 잡는 커피다.

 

이쯤에서 커피나 한 잔 하고 와야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