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58 화장실 찰 무렵

"아침부터 풀방이구먼.."

변기칸을 힐끔대며 옆 팀 선배가 말했다. 오전 8시가 채 되지도 않았다만 누군가에겐 가장 분주해지는 시간이다. 다들 비슷한 시간대에 신호가 오기 때문에.

 

맞은 편 과장님이 일어나면 건너편 팀의 차장님도 일어난다. 5미터는 더 앞에 보이는 지원부서 칸막이에서 머리가 솟구치니 눈치보며 걷던 그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급할때는 직급이고 뭐고 없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 쇼트트랙 선수가 앞발을 쭉 들이밀듯 한 방이 필요한 상황! 결승선 앞에 다다른 사무실의 경보 선수들은 이내 좌절하고 만다. 1등부터 5등의 자리가 이미 채워진 화장실.. 아침이니까 풀방이다.

 

 

옛 말은 늘 옳다. 일찍 일어난 새가 먹이를 먼저 잡는다. 그리고 볼일도 먼저 본다. 그러니 회사 화장실 한 칸을 차지하려는 그대여, 생각보다 경쟁자가 많은 걸 잊지 마시게. 통근버스를 타고 다니는 사우들은 보통 8시엔 도착이다. 회사 근처 사는 자취생들은 대부분 30분 이내 장소에 거주한다. 그리고 빠른 출근이야말로 샐러리맨 기본 덕목이라고 여기던 시대의 산증인인 차부장급까지. 세 그룹이 높은 확률로 화장실을 점령할 후보군이다. 도어-투-도어 출근시간이 1시간은 족히 걸리는 친구들은.. 새벽 출발하거나 장거리 뛰기 전에 화장실 한번 다녀오자^^

 

여기는 모두가 향하고 있을 회사 화장실 앞입니다. 모닝하러 얼른들 오세요~

 

 

 

 

아침 6시 30분, 겨우 눈을 떠 누운 상태로 유투브 영상을 하나 틀어 놓고 밍기적거린다. 잠결이라 뭔지 분간은 안가지만 잠에 다시 빠져드는걸 막는 알람격으로. 50분이 되면 삐걱대며 일어나 토스터에 빵을 넣고 샤워실로 들어간다. 상쾌하게 씻고 나와 토스트에 써니사이드업으로 익힌 달걀프라이를 함께 먹는다. 입가심으로 우유까지 한잔 해치우고 든든해진 상태로 신발을 신는다.

 

뱃속에서 애매한 느낌이 살짝 드는데 시계를 보니 7시 40분이다. 화장실 들렸다가 출근하면 왠지 늦을 것 같다. 잘 먹어 그런가보다 하며 그냥 집 밖으로 나간다. 회사에서 두정거장 거리에 사는 덕에 출근길은 20분이면 충분하다. 5호선 여의나루역에 도착했다. 여유로이 걸어가는 내 옆으로 익숙한 얼굴이 스쳤다. 옆 팀 과장님. 따라가 인사하려다 서로 무안할듯해 그만 뒀다. 무엇보다 굉장히 다급해보이는 뒷모습이 더욱 그래선 안될 것 같았다.

 

자리에 짐을 놓고 PC를 켠 뒤 화장실로 갔다. 출근 직후 화장실은 화개장터보다 붐빈다. 양치하고 손 씻고 머리를 만지는 등 무심하고도 친근한 삶의 군상이다.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도 서넛인데 줄을 선듯 서지 않은 듯 은근한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아까 마주친 과장님도 그 사이 계셨는데 얼굴이 백지장 마냥 하얬다. 출근길의 황급한 뒷모습이 떠오르며 늦게나마 퍼즐이 맞춰졌다. 댁이 꽤 거리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앞엔 두명이나 버티고 섰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한다지만 이럴땐 참 야속하다.

 

직급이 낮을수록 바쁜 아침을 보낸다. 팀원들이 활용할 데이터를 추출해야 하고 회의를 위한 자료 준비에 회의실 세팅도 해야 한다. 그래선지 아침의 화장실에는 사원, 대리 이상 직급분들이 다수 보이는 경향도 있다. 오전 회의는 보통 9시인데, 해외지사와 진행하는 화상회의는 한시간이나 이른 8시에도 열린다. 회의실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오는 사람들은 이른 출근에다 화장실까지 다녀오느라 수고들 많으셨다.

 

 

사찰에선 화장실을 해우소(解憂所)라 부른다. 근심을 해소하는 곳. 보는 눈이 많으니 동자승부터 주지스님까지 본연의 고뇌를 솔직하게 드러낼만한 곳은 화장실이 유일했을거다. 

회사도 똑같다. 0.5평도 되지 않는 그 조그만 공간에서 직장인들은 스스로를 달랜다. 문을 잠그는 순간부터는 나만의 시간이 보장되기에 꾹꾹 눌러놨던 희로애락을 비로소 압축 해제할 수 있는 사내 유일의 장소다. 나름 열심히 준비한 보고서를 퇴짜 맞은 박대리와 다른 회의에서 호되게 당한 김과장은 나란히 옆칸에 앉는다. 이윽고 한결 밝아진 낯빛으로 나왔으니, 볼일을 보며 감정 또한 훌훌 털어보내고 왔지 싶다. 그래, 스트레스 받아봐야 나만 손해지.

 

낮의 화장실은 고요하다. 일에 집중하는 시간대와 화장실 혼잡도는 반비례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때쯤 신호가 와서 화장실로 향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루의 승리자다. 무주공산을 힘들이지 않고 차지하는 기분이랄까? 비데 온풍건조 소리까지 들려오는 걸 보면 전투적인 분위기의 아침시간대보단 확실히 여유로운 한때다.

 

또 다른 태양이 뜨면 화장실로 향하는 직장인들의 발걸음도 시작된다. 화장실 찰 무렵. 루틴이지만 나름 재미진 진실된 아침 이야기.

직장인 친구들과의 술자리 대화가 생각난다. "볼일은 회사에서 봐야 해.. 월급 받고 X싸야 그나마 이득인 기분이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