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 졸음이 몰려왔다.
이번엔 심각한 녀석임을 직감한다. 점심식사 직후나 회의 중의 몽롱함과는 차원이 다르다. 커피에 녹차, 그와중에 브이라인 챙긴다고 옥수수 수염차까지 들이부어도 막상 몰려든 잠은 사그라들 기세가 아니다. 팀을 옮긴 직후라 졸면 끝장이다. 긴장감을 유지하러 굳이 불편한 정장까지 입고 다녔는데도 3주쯤 되었다고 몸이 적응하나보다. 힘을 주지만 이내 스르륵 무장해제되는 눈. 천하장사도 들기 힘든게 눈꺼풀이라더니 일반인인 나는 이미 게임 끝인가?
마음을 다잡고 모니터 화면에 집중한다. 야근을 하지 않으려면 쌓인 업무를 빨리빨리 쳐내야 한다. 엑셀 파일을 열어 데이터를 뜯어본다. 실수다. 이놈의 격자무늬는 흔들리는 최면술사의 펜듈럼처럼 쳐다볼수록 멍해진다. 실낱같은 의식을 부여잡은채로 같은 작업을 반복하다 틀리기를 수번째, 계속해봐야 이미 망한 듯해 동작을 멈췄다. 자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잠깐 눈만이라도 감고 있고 싶다. 5분만, 아니 1분만. 이중에 대여섯은 나같은 상태겠지? 말그대로 살아있는 시체들의 낮이다.
자리에선 졸기엔 위험요소가 너무 많다. 좀비 상태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다행히 낮시간대라 변기칸이 여럿 비었다. 뚜껑을 내리고 그 뒤에 털썩 걸터앉아 스르륵 눈을 감았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화장실 스피커에선 드뷔시의 <달빛> 이 나즈막히 들려온다. 역시 클래식 음악은 눈을 감고 감상해줘야 한다. 고개가 앞으로 떨궈진다. 숙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툭. 90도로 꺾인 목인데 더없이 편안한게 그저 신기했고 잠시만 그 상태로 더 있고 싶었다. 좀비 비주얼이 추가됀지는 생각도 못한채.
신입사원 이후 처음으로 변기 위에서 쪽잠을 잤다. 어느 곳에서보다 잘 쉬었다. 잘 익은 메주냄새에 장이 건강한 소리가 들리는 이곳에서 오늘 처음으로 미소지었다. 힘들다는 생각보단 이렇게나마 쉴수 있어 행복했다.
문을 열고 나오자 새 세상이 펼쳐졌다.
한국 회사들은 크게 강남, 여의도, 종각 부근에 모여있다. 그 빌딩숲 속에 낮잠카페니 수면카페니 하는 장소가 더러 있다.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안락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직장인들은 점심시간이나마 휴식을 취하며 칠링을 한다. 눈을 붙였다 떼면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다 깬 것 같다만 막상 시계를 보면 5분 10분에서 남짓 지났을 뿐이다. 피로감에 비하면 찰나라고 할 수 있는 그 이후엔 개운함이 느껴진다.
작년 11월 경 팀 선배가 스페인으로 늦은 휴가를 다녀왔었다. 지중해 연안의 몇몇 국가들에서는 '시에스타(Siesta)' 란 낮잠 풍습이 있는데, 한낮의 지침을 한두시간의 낮잠으로 회복해 다시 열일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십수년 전쯤엔 국가적 차원의 업무 효율성 저하로 인해 관공서 등에서는 폐지한 상태라곤 하다만 그 지역에선 여전히 일반화 된 문화. 정오를 넘어서면 식당들도 다수 문을 닫기에 눈치껏 가게 문이 열린 시간에 들이닥쳐 식사 했어야 했단다. 일반 사기업들도 시에스타를 지키려나? 한국 회사들도 30분 정도라도 잘 수 있는 시간을 주면 좋겠다. 낮잠 자면 또 퇴근이 늦지 않겠냐고? 야, 너두 '야근'할 수 있어!
점심을 먹고난 오후께면 아무 생각없이 그냥 멍 때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상태로 풀썩 쓰러져 잘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텐데. 그때마다 옆자리 선배의 키보드 타자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와 정신이 번쩍 든다. 하던 일을 80% 마무리하면 새로운 뭔가가 주어지는 이 무한루프는 무슨 게임 퀘스트냐? 조금만 쉬어야지 싶다가도 느린 업무 속도에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눈치를 본다. 그냥 당분간은 덜 쉬고 더 일해야겠다. 적응하면 일처리도 빨라질거야! 그럼 쉬는시간도 늘어나겠지!
사내 메신저로 동기와 대화를 주고 받는다. 몽롱한 상태로 시덥잖은 얘기를 나누다 커피 타임이나 갖기로 했다. 친구들과의 수다에는 졸음이 끼어들 틈새가 없다. 학교에서도 수업땐 정신을 잃다가 쉬는시간 종소리에 눈이 반짝이곤 했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참 미스테리한 일이기도 하지. 잠깐동안의 조우를 마무리하고 다시 20층 버튼을 누른다. 배터리 방전되기 전에 얼른 업무를 끝내야 한다.
고됨을 아는 자만이 쉼의 미학을 안단다.
우리는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다. 열일하는 사람들이 흔들리면 국가도 덩달아 흔들린다. 고로 우리가 못 쉬어 비실댄다면 대한민국이 무너진다는 완벽한 삼단논법! 내가 회사에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는 야근시간이 대답해줄테니, 그쪽에서 내게 뭘 해줄건지 물어봐도 실례가 아닐거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열심히 일했으니 잘 챙겨 쉬기도 하자. 뻔뻔함이 아닌 당당함과 함께.
쪽잠, 선잠, 새우잠. 애처로운 귀여움이 묻어나는 단어들이다. 애처롭고 귀엽게 오늘 쪽잠을 잤다. 목디스크가 올만한 자세로 화장실에서라는, 최악이랄수도 있을 상황이 오늘의 내겐 최선이고 최고였다. 변기 위에서나마 눈을 붙일 수 있음에 너무나 감사했다. 멋지진 않지만 부끄럽지도 않은 직장인의 낭만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인위적인 업데이트 보단 직접 겪은 경험의 체득으로 자연스럽게 성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움에서 익숙함으로 넘어가는 이 과도기의 고됨은 긍정적인 신호일거다. 그런 배움의 자세가 업무환경과 나란할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과로, 병가, 산업재해의 시작은 체력과 면역력의 저하이고 다시 매일의 회사생활로 귀결되는 인과관계. 사회적 분위기덕에 많이 나아지곤 있다만 꼬꼬마 사원인 내 눈에도 아직은 갈길이 먼듯하다. 위에서는 생각해본적 있을까 모르겠다. 부르짖으시는 위기의 주어가 과연 어느 쪽이어야 할지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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