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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56 토요일엔 빨래를 하겠어요

 "여보세요?"

 "어 뭐하는데?"

 "뭐하긴, 빨래 돌리는 중이다."

 "아 나도 빨래해야 하는데.."

 

이것은 흔한 자취생들의 주말 대화다.

다시 자취를 시작한지 20여 일 째, 부모님께 얹혀사던 시절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다.

독립으로 인한 득이 있다면 그 실도 명확했으니 세끼 챙겨먹기에 침대정리, 각종 관리비 납부까지 그동안 신경쓸 필요도 없던 하나하나가 모두 일로 다가왔다는 점.

밥 먹으러 나오라시던 어머니 목소리가 문득 그리워지는 저녁이다. 배달음식은 건강에 별로일 것 같고 해먹는 건 귀찮다. 친구들과의 식사는 반갑다만 신나게 떠들다보면 시간을 너무 잡아먹히는 느낌이다. 결론적으로 음식이 위장에 들어가 포만감을 주기 전까지의 식사 과정은 험난하고도 번거롭다. 오늘 저녁은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하려나?

 

끼니 때우기와 더불어 루틴하게 돌아가야 하는 집안일은 빨래를 들 수 있겠다. '에이~ 요즘 세탁기에 건조기까지 있는 시대에 빨래가 일이란건 좀^^' 하는 친구는 아마도 혼자 살아보질 못했을거다. 자취생들이라면 의례 빨래에 대해 왠지 모를 아련함과 거북함을 느낄텐데.. 생각보다 챙길거리가 많아 잔신경 쓰이는 과업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세탁세제와 섬유유연제를 항시 구비해야 한다. 없으면 시작부터가 안된다. 동네 편의점부터 소셜커머스 사이트에서도 손쉽게 살 순 있지만 소모품이다보니 두달에 한번 꼴론 구매해야 한다. 언제든 살 수 있으니 내일 모레로 미루다보면 정작 빨래 해야 하는 타이밍에 없단 점이 함정이랄까? 본가에 있을 땐 부모님께서 알아서 사다 놓으셨던 기본템이었다.

 

주기적으로 세탁기 내부 청소를 해줘야 한다는 점, 알고 있었니? '알긴 했다만 직접 해본적은 없다.. 귀찮으니까..' 하는 친구들 손! 가끔 빨래한 옷에서 냄새가 날 수 있다. 그렇다고 섬유유연제를 들이부으면 피부 트러블만 되러 날 뿐이니 이땐 세탁통 청소를 해줘야 한다. 알려줘도 너 안하게 될거야, 귀찮으니깐.. 집에선 어머니께서 챙겨주시는 일이었다.

 

자취생들에게 빨래는 가슴 찡하게 만드는 단어다.

여태 부모님께서 세탁해주시는 옷을 착착 걸치기만 하다가 이젠 입은 옷을 직접 빨아야 한다는 서글픔 그리고 몇 시간 뒤면 출근날이라는 슬픔의 감정까지. 보통 일요일 오후경 빨래를 하는데 탈탈대며 돌아가는 탈수음은 정시를 알리는 유럽 교회의 종탑소리처럼 빨래의 끝과 주말의 종료를 동시에 선포한다.

홀로 서기 1달째, 그나마 덜 슬프기위해 토요일에 빨래를 하고 있다. 결국 조삼모사격이긴 하다만.

 

 

 

 

본격적으로 빨래를 시작할 차례다. 돌리는건 세탁기가 해도 세제는 내가 넣는다. 요즘엔 자동세제 투입기능 있는 녀석들도 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사람이 일정량을 넣어주긴 해야 한다. 알파고니 AI니 판치는 세상에 아직 인간이 설자리가 남아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세제를 붓는다. 그런데 이걸 어느정도 부어줘야할까?

 

세제통엔 권장 투입량이 적혀있긴다만 프로 자취생인척 손계량으로 넣는다. 너무 넣으면 덜 헹궈질수 있어 몸에 안좋다며 보수적으로 세제 양을 조절하면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인다. 세탁통이 돌아가며 빨래는 시작되었지만 거품이 너무 안난다 싶어 좀체 세탁기 앞을 떠날줄 모른다.

빨래는 거품 속에서 철썩대는게 제맛이라며 세제를 충~분히 넣어주는 날도 있다. 이번엔 너무 과하다싶어 헹굼 및 탈수 횟수를 늘린다. 엄마는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각 한번씩 무심하게 넣으시고도 완벽한 빨래를 하셨었다. 나는 실험실에서 스포이트 쓰듯 조심스레 넣고 있다만 아직도 감이 잡히질 않는다. 나대지 말고 세제 뚜껑컵이나 활용해야겠다^^

 

세탁된 옷을 널어보자. 오징어도 바람 잘 드는 언덕에 말려야 맛있다는데 옷도 똑같다. 현실은 언덕은커녕 15평 남짓 오피스텔 방 안이다. 그나마 집이 남향이라 햇볕은 잘들어온다는 점을 위안 삼으며 빨래를 탁탁 털어 넌다. 좁은 공간 와중에 가장 양지바른 곳에 인터넷에서 구매한 1인용 접이식 건조대를 펼쳐 빨래를 내건다.

혼자 사는 주제에 빨랫감은 왜이리 많은지 건조대에 다 널기엔 택도 없다. 걸 곳이 부족해 암벽등반가 마냥 옷장 손잡이나 창가 언저리처럼 삐쭉 튀어나온 곳을 찾아 눈을 돌린다. 마무리하면 사방이 옷인데 그 꼴이 넝마주이의 거처나 귀신의 집을 방불케 한다.


적막함을 채우려 셔츠를 괜히 더 팡팡 턴다. 그 소리론 부족해 TV를 켠다. 이럴때마다 나오는 홈쇼핑 채널. 딱히 채널을 돌리지 않고 계속해서 빨래를 넌다. 잘 보지도 않는 TV를 굳이 놓은 이유가 바로 이럴 때를 위함이다. TV 소리라도 듣다보면 그나마 덜 혼자인것 같달까?

 

 

자취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은 홀로 산다는 걸거다. 눈치 볼 필요도 없고 누군가를 챙기지 않아도 된다. 냉장고를 채우고 비우는 것도 나요, 쓰레기를 만들거나 없애는 일도 내가 한다. 가끔씩 외로움이 찾아온다만 그래도 전적인 자유가 보장된 이런 삶이 효율적이긴 할거다. 물론 유대나 사랑 류의 감정이 효율을 뛰어넘는 마법같은 순간이 존재하긴 하지만. 

 

혼자 살수록 잘 입고 다녀야 할 필요성이 있다. 화려함보단 단정함과 깔끔함으로 대변되는 클래식함이 자취생 스타일링의 최고 덕목중 하나인데, 여기서 향기도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한다. 향수도 좋지만 섬유유연제 향은 신경쓴듯 안쓴듯 자연스러운 느낌이랄까? 삭막한 업무 이야기 중에도 그 은근한 향기가 거리감을 메꿔줄때도 있더라. 양 조절 잘하시고~ 어느정도 넣어야 하는지는 엄마께 여쭤보세요:D

 

빨래를 마무리하고 커피를 한잔 내려 침대에 앉아있으면 꽤 중요한 거사를 치른듯 개운하다. 적어도 내게만은 주간단위의 행사이긴 하다. 한주를 같이 고군분투한 옷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한다. 또 다음주를 무사히 보내자는 결의에 찬 만남이다. 갓 빨아 축축하면서도 차가운 옷은 말라가며 온기가 돌고 부드러워진다. 주중에 세차게 비 맞으며 한껏 긴장됐던 내 몸과 마음도 주말을 보내며 조금씩 풀려간다.

 

잘 마른 옷가지를 곱게 개어 집어넣는다. 속옷이며 셔츠며 옷장 속 원래 자리에 안착한다. 제자리로 돌아갈 시간이다. 출근은 피하고 싶다만 회사가 내자리라고 느껴지는 걸 보면 나도 직장인이 다됐나 보다.

 

빨래가 끝났다. 모두가 말쑥해진 상태로 월요일을 기다린다. 잘 보내던 못 보내던 어떻게든 한주를 보내고나면 주말에 또 새로운 빨래를 하겠지. 홀로서기가 너무나 체감되는 빨래, 그래도 이맛에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