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다.
빼도 박도 못하게 이젠 진짜 서른 살이다. 글로벌 나이로는 아직 스물 아홉 살. 희한하게 한국만 태아기간의 그 1년을 1살로 산정한다. 사실 엄마 뱃속에서 존재해오던건 맞으니 합리적인 셈법이다만 늙어가는 관점에선 게임 시작 전부터 1골 먹히고 들어가는 셈이라 코리안에이지 뻐킹..^^ 누가 정한건지 몰라도, 왜, 아빠 쪽에 있던 기간부터 헤아리자시지 그랬어요? 호전적이지만 이것이 실제 서른이 나이를 받아들이는 자세다.
애써 긍정적으로 보자면 한국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세계인의 형누나이자 언니오빠랄까? 날 때부터 1살을 먹여버리니 반강제적으로라도 0살들보단 어른스러워야 할거다. "느그 0살이제? 내 느그 나이 때 나이 1살 묵고! 마 다해쓰!"
서른이 되며 나이들어감에 대한 멘탈이 강해졌다.
이십 대엔 가끔 '아저씨'소리 들을때(정말 가끔이었다. 손에 꼽을 정도로) 서글펐다면 이젠 그냥저냥 무덤덤하다. '삼춘'이라는 어중간한 늙음의 존칭도 흔쾌해졌다. 조카와의 놀이시간도 이젠 1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만 같다. 입만 웃은채로 쓰다듬어줬던 어린이들이 약간은 귀엽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재라는 대명사를 거부할 수 없다면 그 앞의 형용사라도 잘 받아봐야 한다. 멋진 아재, 잘생긴 아재, 친절한 아재, 돈 많은 아재.. 소망의 2번 아니면 꿈의 4번 하고 싶습니다!
삼십 대 언덕에 발을 디디며 체력 저하를 체감하는 중이다.
하루정도는 밤을 새어도 스트레칭 한번으로 무탈히 보냈던 이십대 초중반이었다. 철야 후엔 좀비상태로 겨우 하루를 때우곤 침대에서 엎어져 반가사상태에 빠져드는 슬픔의 시기에 당도했다. 어른들이 그리도 부르짖으시던 그 정신력, 정신력! 이젠 가슴에 와닿아 별이 되었다★
비슷한 개념으로 회복력이 떨어졌다. 멍이 들고 다쳐도 금새 회복하곤 했던 상처가 어느 날부턴 잘 아물지 않는다. 우리 삼십대는 더는 다치면 아니되니 몸들 사리시오!
서른에겐 현자타임이 찾아올 때가 잦아진다. 너의 은밀한 행위 뒤에 오는 그거 말고.. 밥 먹다가도 쓸데없이 걱정되는 미래에다 노는 와중에 부지불식간 염려되는 모든 것들. 그 있잖아, 퇴근길 내 모습에 급격하게 슬퍼지는 타이밍, 고민을 그저 흘러보낼 시기는 지났음을 알게 되었을 때, 장난기만 보이던 얼굴에 다른 뭔가가 겹쳐 보이는 날에.
이십 대가 저문지도 열흘 이상 지났다.
2019년 1월 1일 0시. 빨간 TV장에서 흘러나오는 보신각 종소리에 한 살이 더 얹혀 나왔다. 침대에 기대어 제법 경건하게 맞이한 세월의 전환이었다. 내딴엔 나름 고무적이고 희망적으로 서른을 맞이했다. 스물 여덟에서 아홉이 되는 순간에는 이십 대를 잘 마무리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여타 감정을 압도했다면, 삼십 대로 넘어가면서는 새로운 10년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이 고개를 내밀었다.
서른 살이 되기 며칠전 본가의 내 방을 정리하러 내려갔었다.
책장과 서랍을 뒤적이다보니 10년 전 고등학생의 내가 보던 토플책이며 수학 문제집에다 옛 필름카메라 사진, 이제는 보지 않는 각종 잡동사니가 한아름이다. 1시간이면 후딱 끝낼 것만 같던 정리 진척이 더뎌졌다. 채우라는 폐기상자는 까마득히 잊은채 기억상자를 몇개나 헤집은지 모르겠다. 추억은 우연하게 동시에 의도적으로 마주치곤 한다.
그러다 찾아낸 미국생활 중 찍은 사진 속에 10대 초반에 만나 함께 서른을 바라보는 친구가 보였다.
아직도 미국에 있는 그놈과 최근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우리 몇일 뒤면 사람들이 나이물어볼 때 서른이라고 해야 된다. 믿어지나?"
"야ㅋㅋ 넘 좋지 않냐? 나 서른이 언제쯤 올까 너무 궁금했는데, 이제야 왔어."
"젊음이 사라지는 거에 대해선 두려움 없냐?"
"왜 사라져. 여태까진 준비기간이었고 이제 진짜 본게임 시작이야."
"어른이 된 것 같나 이젠?"
"아니ㅋㅋ 느낌은 비슷한듯? 다만 앞으론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걸 체감해."
활화산 같던 10대에 항해를 시작해 20대라는 폭풍우를 헤쳐나가던 두 친구는 이제 30대를 맞이한다. 휘몰아치는 바닷물과 바람을 아직 두드려 맞곤 있지만, 풍파가 더 셀지언정 본격적으로 재미날 것 같다면 무지인가 객기인가 아님 미친걸까?ㅎㅎ
16살의 어느날 녀석과 기차안에서 주고 받던 문답의 주제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 우리의 결론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었는데, 소년이여 야망의 가져라 수준의 겉멋이 그땐 사뭇 진지한 고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도 모든 것을 가졌지만 죽음을 피하려던 진시황보다 가진 건 그 생각 하나뿐이었던 그 시절 꼬맹이들의 태도가 되려 낫지 않았을까 싶다. 벌써 15년이나 흘렀다. 시간은 흘렀지만 그때의 마음가짐은 흘러보내면 안될텐데.
감사의 대상도 늘어났다.
서른살이나 먹었다만 부끄럽게도 아직 정신적으로는 애티를 벗지 못한걸 알고 있다. 나에 대한 어머니의 관심사는 여전히 끼니 걱정, 길 조심, 건강 조심이다. 아버지께서 외부에 소개하는 나는 아직도 '우리 애기'다. 한결 같으면서도 무조건적인 부모님의 사랑은 감사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피곤함과 고됨을 버텨내주는 내 몸이 참 고마운 요즘이다. 정신과 신체를 구분짓는다치면 생각을 실행해주는 몸이야말로 가장 가까운 동반자다. 차량은 그렇게 신경써서 유지, 보수를 하는 판에 정작 내 몸은 어느정도로 챙기고 있는지 반성해본다.
덤으로 술집에서의 주민등록증 검사는 소소하고도 감사한 이벤트다. 이젠 거의 아에 절대 못 받지만..
반년 전, 팀 식사자리에서 나온 나이대마다 느껴지는 인생 속도 이야기가 떠오른다. 50대인 팀장님의 인생은 50km/h로 흘러가고, 40대인 차장님의 인생은 40km/h로, 30대인 대리님의 하루는 시속 30km, 스물아홉 내 시간은 29km/h로 달려가고 있댄다. 어느덧 나의 인생도 시속 30km대에 진입했다.
달리는 고속열차안에서 밖을 보면 빠른지 잘 체감이 안된다.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기차가 스쳐지나갈때야 비로소 '겁나 250km/h구나!' 싶다. 일상이 그렇다. 열심히 사는 것과 시간을 인지하며 사는 건 다른 개념이다. 회사-술집-회사-술집 라이프사이클은 말할 것도 없고, 회사-집-회사-집 같은 대다수의 그것에도 의외로 시간에 대한 감각은 빠져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한달이 지나고 한 일년이 지나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열심히는 산 것 같은데.. 뭘했지?'
경주마의 눈 옆엔 가리개가 달려있다. 주변시야를 차단하면서 바로 앞의 골인지점만 보도록하는 일종의 보조장치다. 하지만 잘 달린다는 건 눈 앞으로 맹렬히 질주하는 것만이 아닐거다. 단지 레인에서 빠르게 달리는 정도겠지. 짜여진 경주에 특화된 말은 실제 초원에선 방향성을 잃어 갈팡질팡한다. 가림막을 치우고 스스로 방향부터 결정케 해준다면 똑똑한 말일수록 더 잘 달릴 수 있다. 어른들 또 회사 상사들이 흔히 말하는 '우리네 바람직한 커리어 코스'는 사실 뫼비우스의 띠 같은 경기장 속일거라는 의혹, 가져본적 있니?
인생의 방향성과 더불어 고민해야 할 숙제는 그 속력에 발맞추는 법일거다.
두다리로 단순히 달려서는 미친듯이 달려가는 시간을 도저히 따라잡기 힘들다. 이럴땐 비슷한 속력의 뭔가에 편승하거나 중간지점에 먼저 도달해 기다리는 식과 같은 각자만의 방법이 필요한데, 나의 경우엔 삶에 새로움을 계속해서 주입해주면서 시간의 속도감을 온몸으로 느끼는 쪽이다.
말이 거창하지 의외로 간단하다. 평소 해보고 싶던 일을 짬짬히 해본다든지 관심있던 분야에 대한 학습을 시작한다든지 평소 생활의 루틴에 약간의 변화를 주면 된다. 그 언젠가 유행한 단어인 Nudging하듯 툭. 이사를 가거나 회사를 옮기는 큰 시도부터 새로운 취미생활을 가져보는 소소한 류까지 새로움을 맞닥뜨리는 길은 많고도 넓다.
올해의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낯섦을 여럿 받아들이고 있다. 거주지를 옮겼고, 회사와 업무가 바뀌었으며, 주변의 사람들이 변했다. 인생의 방향성과 속도라는 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서있다. 처음엔 흔들리겠지만 점차 균형을 잡아갈거다. 그리고 끝내 펄쩍 뛰어가며 재주도 부릴거다.
하이데거는 낯선 것과의 조우를 통해 이성이 시작된댔다.
비로소 낯선 이성(異性)보단 이성(理性)에 대해 사고해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삼십 대의 빠른 조류 위에서 새로움을 수용하는 감각을 앞세워 노 저어가는 나는 서른 살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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