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를 내고 길을 떠났다.
요 근래 글감이 떨어졌다. 요리조리 소재를 찾아봐도 또 글은 엉덩이로 쓰는 것이라며 진득하니 앉아있어봐도 쓸만한게 떠오르지 않더라. 가끔가다 오는 영감은 마른 잔기침 마냥 시원찮아 이내 글쓰기를 포기하곤 했다. 집돌이로 하루를 마감해야 하려나?
버스 안에서 소설 구상을 한다는 어느 작가의 이야기를 들은적 있다. 아무 버스를 잡아타서 종점까지 갔다 다시 돌아오는 그 시간 동안 소설 한 편의 가닥을 잡아온단다. 정말로 낯선 이야기와 조우하려면 즉흥적인 시간대에 생각지못한 장소로 안내하는 버스에 탑승해야 할 것만 같은데, 성향상 낭만 아닌 유랑만 될 것 같아 아쉬운대로 자가용에 올라탔다. 김삿갓이 천하를 떠돌며 명문장을 남긴 것처럼 나도 어디론가 떠날거다. 방랑 중에 뜻밖의 소재를 찾을거란 기대와 함께.
달리다 커피 한잔 하고 싶었다. 잘 마시진 않지만 작가와 커피는 제법 잘 어울리는 이미지니 그 진한 향과 함께라면 뭔가 쓸거리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미국 드라마의 주인공은 어디론가 떠나는 와중 길목에 홀로 덩그러니 놓인 레스토랑 겸 카페에 우연히 들어서곤 한다. 빈티지풍의(혹은 진짜 빈티나는) 간판을 내걸고 싸구려 커피 단일메뉴지만 묘하게 끌리는 그런 곳.
현실은 '○○상회', '▲▲전빵' 인 골목이다. 뜻밖의 장소에 우연찮게 들어서고 싶어 골목을 빙빙 돌다가 결국 스마트폰을 잡았다. 우여곡절 끝에 크진 않지만 나름 감성적인 카페를 찾았다.
차에서 내리는 내 오른손엔 살구빛 색이 감도는 책이 들려있다. 제목부터 소설을 써보겠단 강한 의지를 표출하는 데이먼 나이트의 저서 <단편소설 쓰기의 모든 것>. 느긋하게 산보하듯 출입문에 도착했더니 펜을 깜박했다는 생각에 황급히 다시 주차장으로 향했다.
숙소 체크인 후 침대에 기대어 연습장을 폈다. 이번엔 정말로 매력적인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을 것 같던 마음도 잠시, 펜은 쓰지 말고 돌리라고 있는건가 싶다. 손가락 사이에서 어지럽게 돌아가다 방구석으로 튕겨가는 펜 소리를 신호로 슬그머니 일어나 핸드폰 주소록을 켰다.
놀러온건 아니지만 그래도 온김에 봐야 한다며 근처 사는 친구를 불러냈다. 그나마 생각없는 놈이란걸 위안 삼으며 소주를 입에 털어넣는다. 술을 마시면 처음에는 생각이 많다가도 이내 아무 생각도 없어진다. 이래서 할아버지가 약주라고 부르셨나보다. 일 얘기, 사는 얘기, 실 없는 말까지 나오는 대로 뱉다가 대화거리가 떨어지면 언제나 한쪽에서 마지막 한 마디를 건냈다.
"막잔하고 일어나자."
전날 과음하게 되면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온다. 해장시엔 말 그대로 소처럼 퍼먹는다. 속이 안좋아도 억지로라도 먹어야 한다. 우걱우걱 밀어넣어 입 안 가득찬 음식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면 꽉 막혀있던 가슴도 어느순간 풀리니깐. 제법 살만해지니 기억나니, 내가 여기 왜 왔더라?
글 쓰러 왔었다. 글감과 영감을 얻으려 떠나온 여행이다.
바쁘고 피곤한 와중에 목적을 가지고 먼길 왔으니 낭비할 시간이 없다. 어제 괜히 놀았다며 반성의 시간 먼저 가졌다. 별 이유도 없었는데 왜 그리 마셔댄지 모르겠다. 술기운이 남아있는 것 같아 심호흡을 몇 번 했다. 본격적인 집중 전 근육까지 풀어주다보니 십여분이 금새 지났다. 오션뷰 카페에서 경치 감상을 빼먹으면 또 서운하지. 눈과 맞닿은 수평선, 그 위 하늘도 너무 예쁘다.
속 달랜다는 빌미로 점심때 국물만 마셨더니 뱃속은 거의 공복 상태였다. 숙취가 가시매 그 빈자리를 채우려는 듯 배고픔이 밀려오는데 저녁은 뭐 먹을지 은근 고민이 됐다.
보통 글 쓰려 앉으면 랩탑을 펼치고 오른쪽엔 연습장, 그 옆엔 소설 혹은 인문교양서적 몇 권 놓아둔다. 글 쓰다 막히면 책도 간간히 읽고 또 낙서도 끼적이는 용도랄까? 생각을 구체화시키는 고된 노동 중 최대한 육체/정신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마련한 나름의 방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온종일 앉아있다보면 눈도 침침해지고 어깨도 쑤셔오지만 헤라클레스가 과업을 수행하듯 진지하게 임한다. 내게 있어 글쓰기는 취미요 즐거움이니깐.
카페 창문에 심각해보이는 얼굴이 바다와 오버랩 되어 비친다. 부산까지 와서 이야기거리를 고민하고 있는 이 상황이 귀여웠던지 순간 웃음이 나온다. 둘둘 말린 스프링노트처럼 구부정해진 허리를 펴고 목을 뒤로 쭉 젖혀본다. 자연스레 입이 열리고 크게 들숨을 쉰다. 햇볕이 바닷물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다. 기분 좋은 나른함에 한껏 취해본다.
하긴, 참 고민이긴 하다. 숨 쉬듯 글 쓰고 싶은데 실상은 생각을 위한 생각에 구상을 위한 구상이다. 호기롭게 길을 떠났다가 빈손으로 돌아가긴 싫어 발버둥치고 있는 것 같아 양쪽 볼이 뜨겁다. 알면서도 굳이 또 하는 걸 보면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라는 철지난 유머문구가 생각난다. 글쓰기는 취미요 즐거움이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미덕이라 믿었다. 모든 일엔 목적의식이 있어야 한다는게 내겐 당연했다. 설령 달성하지 못할 때가 있더라도 말이다. 그래선지 마음가는 대로 살거나 현재를 즐기는 소위 욜로(YOLO)족은 그다지 생각없이 사는 사람들인양 느껴졌다.
조금은 다각화 된 시각에서 본다면 한심했던 건 되려 나였을 수도 있다. 일상은 프로그램화되어 있지도 톱니바퀴처럼 짜맞춰져 있지 않은데.
짧은 여행 막바지에 드디어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따지고 보면 구색은 여행으로 갖췄다. 그런데 실상은 출장이었다. 뭔가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휩싸여 시간을 보냈다. 막상 머리를 비우다보니 계획했던 궤도에서 벗어나도 충분히 괜찮을 것 같단 느낌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비로소 멋진 일을 마주칠 수 있겠다 싶었다. 생각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다보니 여태까지 신봉하던 짜임새 있는 일상살이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서운 법이란다.
연결고리가 희미해보이긴 하다만 옛 일이 떠올랐다.
어린시절 할아버지 댁에 방문하면 주로 텔레비전를 보며 시간을 보냈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떡이며 과일을 씹으면서 만화를 보는 맛은 정말 꿀맛이었다. 손주들이 보고 싶어하던 프로그램을 너그러이 틀어주시던 할아버지는 식사를 할 땐 냉정할 정도로 TV를 끄셨다. "밥상 앞에서는 밥 먹거라." 그때마다 TV 보면서도 밥 잘 먹을 수 있다며 부르짖었었다. 고리타분한 옛날 사고방식이라며 입을 쭉 내밀고있다 괜히 한소리 더 듣곤 했었다.
29년간 열심히 밥을 먹다보니 음미하면서 먹을때 가장 맛있게 배부르더라. 현재 상황에 충실할 때 비로소 음미할 수 있다.
여행지에서 생각이 멈췄을 땐 나름대로 그 이유가 있을거다. 바다를 보면서 굳이 글감을 생각할 이유가 없고 친구와 술 한잔 하면서 애써 소재를 고민할 필요도 없으며, 숙취에 시달리는 와중에 교훈적인 의미를 갈구할 까닭은 더더욱 없다. 여행지에선 여행을, 밥 먹을 땐 그저 눈 앞의 밥만 떠먹는 게 최고다.
어린 나는 사실 밥을 씹으면서도 브라운관이 자아내는 자극적인 색채와 소리에 홀려 얼이 나가있었다. 결과적으로 시청도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렇게 밥을 먹고나면 먹는 즐거움은 커녕 속만 더부룩해 꽤 오랜시간을 웅크려있곤 했다. 그때 TV를 잠시 끈 뒤 식사 후에나 다시 봤었다면 기분 좋은 배부름과 함께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을까?
생각하는 행위, 고급지게 말해서 사유(思惟)라는 것은 고등지성을 갖춘 인간만의 권리다.
오귀스트 로댕의이 제작한 <지옥의 문> 을 구성하는 작품들 중에서 <생각하는 사람> 이 특히 유명한데는 이유가 있을거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러 그림과 조각의 주인공들은 대개 뭔가를 골똘히 고민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누군가가 생각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경외감이나 감동 혹은 동질감까지, 어떤 감정이 느껴지곤 한다. 집중하는 이성의 모습에 섹시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보면 생각하는 행위는 분명 매력적임에 틀림없다.
몰입은 참 좋은 말이다. 목표를 설정하고 거기 집중한다는 건 멋진 일이다. 그러나 의무감에 억지로 생각가닥을 부여잡는 것은, 붙잡는 사람이나 붙잡힌 생각이나 서로 힘든 일이다. 생각에 빠져있는 것과 사로잡히는 것은 명백히 다르니깐.
10대 시절부터 고민이 많았던 내게 친구가 이런 말을 해주더라.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거기 되려 잡아먹히지 않도록 주의해."
생각하려 떠난 여행에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글쓰려 도착한 여행지에서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그저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놀다왔다. 그런데 여태없이 마음이 편안한 건 왜인지 몰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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