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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49 대화가 필요해

평탄하고 안정된 회사생활중에 나름 고민의 시기가 도래했다.

조직 이동 대상자 간담회를 다녀온 날이다. 우리 깃수는 이번에 새로 도입된 두가지 인사 이동 코스 중 하나를 택하게 된단다. 전부터 이번 정책에 대한 소문을 들은바 있어 이미 한쪽으로 어느정도 마음이 간 상태였으나 멘토 선배님과의 대화 이후 다시 저울의 균형이 맞춰졌다. 고민 보따리를 짊어지고 동기들이 모여 있는 식당으로 뒤늦게 향했다. 늦게 도착해선지 내가 온지 얼마 되지 않아 하나 둘씩 자리를 떠났고 남은 몇 녀석들과 단출한 술자리가 이어졌다. 얼굴에 '고민'이라고 쓰인 나 때문이었을까? 만날 때마다 텐션이 잔뜩 올라 떠들던 우리들은 오랜만에 나즈막히 두런대는 시간을 보냈다.

 

 

저녁 11시. 술기운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지만 피로감을 느끼며 집에 들어왔다. 어머니께서는 거실에서 드라마를 보고 계셨고 안방은 불이 꺼져있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곧장 방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거실 바닥에 털썩 앉았다.

 

"아빠는요?"

"방에서 주무실걸."

"엄마, 나 3년차 사원이라서 올해말 이동 대상자잖아요. 그래서 오늘 이동 관련해서 서울에 간담회두 다녀온거구. 두가지 코스 중에 선택해야 하는데 고민이 되서."

 

몇 마디나 주고 받았을까? 주무시는지 알았던 아버지가 나오시며 양자회담은 다자회담으로 발전했다.

대기업 30년 근속의 베테랑 회사원이셨자 지금은 경영 일선에 계신 사회생활 선배님, 구성원과 리더를 모두 경험한 역전(歷戰)의 용사가 등장하시매 새삼 든든해졌다. TV 보시며 운동 중이셨던 어머니와 잠옷 차림의 아버지 그리고 셔츠를 벗다만 나까지, 마치 희극의 한 장면 같으나 우리 식구는 오랜만에 진솔하고 진중한 대화를 나눴다.

 

대문을 열고 들어올때만 해도 반쯤 감겨 있던 두 눈이 조금씩 반짝이기 시작했다.

 

 

 

 

직장인이 되며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량이 부쩍 늘어났다.

친척분들께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하라는 조언을 여럿 받았었다. '너희 아빠, 그 자리 고스톱 쳐서 딴 거 아니다?' 라시던 큰이모 말씀을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다. 대기업에 입사해서 그냥 오래 근무하면 진급도 하고 한자리씩 받는지 알았으니깐. 막상 생활해보니 진급을 하기도 직책을 얻기도, 하물며 오래 근무하는 것마저도 쉽지 않은게 현실이었다.

학생 땐 어머니와 대화가 더 편했었다면 입사하고부턴 아버지와도 제법 잘 통한다. 어머니껜 특유의 세심함을 느낄 수 있다면 아버지에게선 오랜 사회 경험을 바탕으로 한 넓은 시야가 드러난다. 어머니는 그간 학생이었던 나의 보폭에 맞추어 함께 가주셨고 아버지는 현재 사회인인 나와 보폭을 나란히 하고 계신다. 바통 터치!

 

"사원/대리급이 조직 내에서 크고 멋진 일을 맡겠다는 생각은 시기상조 격이. 게다가 대기업서 오래 일해봐야 업무적으로 배우는 건 생각보다 별로 없다. 너는 그냥 주어진 분야의 일만 계속 하면 되는 역할이라.. 근데 시스템이 돌아가는 그림이라든지 거대한 조직 특유의 체계화라든지 다양한 부서의 수많은 사람들과의 교류와 협업의 과정, 어느순간 네 안에 체득화 되어있을 그런 것들을 잘 챙겨야지."

 

 

어머니들은 대다수가 안정지향적이시다. 아이들이 도전하고 버텨내고 이겨내야만 더 성장할 수 있단걸 머리론 아시지만 가슴은 원치 않으시는 분들이 바로 우리 마덜들. 귀한 아들, 딸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미어지시니깐. 배 아파가며 낳은 한 몸 같은 자식이기에 그네들이 성취보단 안정을 택했으면 하는 마음이 크시겠지. 그래선지 어머니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서라도 고민 상담을 하지 않는 편이다. 이번에도 이동문제 고민을 말 안하려다 대화를 나눴고, 결과적으로 참 잘 한듯 싶다.

 

"아들~ 만약 이동해서 힘들다면, 그 힘듦 조차 경험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마음 편히 가지고 일해. 네가 스트레스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몇 달 전 종영한 모 코미디쇼의 간판 코너였던 <대화가 필요해>. 10년이란 시간 동안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강산도 변하는 그 세월간 비슷한 스타일의 멤버, 큰 변화 없는 포멧과 연출로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터운 팬층을 보유했었다. 아빠, 엄마, 아들로 분한 코미디언들에 투영된 자기 모습을 봐서인걸까? 호통 치는 아빠와 이것저것 이야깃거리 많은 엄마, 할 말 많지만 안하는 아들까지 비슷하다. 늘 같은 아버지의 멘트로 막이 열리매 각자 말을 뱉기 시작한다. "밥 묵자."

 

예로부터 밥상머리 교육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루어지고 있다. 대놓고 '이거 가르쳐줄게, 배워!' 와 같은 지도가 아니라 눈을 맞추고 대화를 하며 자연스레 여러가지를 체득하는 형태의 훈육. 아이들은 식기 사용법 등 식사시 예의범절을 넘어서 부모님, 형제, 자매와 시간을 보내면서 려와 공감, 서로를 이해하는 법을 배운다. 배를 채우며 마음까지 충만해지는 자리다.

 

세 식구의 저녁식사 자리가 배경인 <대화가 필요해> 의 시작은 늘 정신없다. 아빠, 엄마, 아들까지 각자 할 말만 목 터져라 외치다 다투고 씩씩 댄다. 그러나 마무리엔 가족의 정(情)을 (다소 해학적으로나마) 전하며 훈훈하게 끝난다. 다소 상투적인 구성이나 묘하게 현실반영적이다. 실제 가정의 식사자리는 영화에서 보이는 것만큼 신나고 즐겁진않다. 보통은 밥 먹으며 제각각 뭔가를 한다. 방에서 혼자 먹고 싶어하는 아들, 핸드폰과 숟가락을 번갈아 쥐는 딸, 주부들의 원더랜드인 드라마에 눈이 가계신 어머니, 근엄하게 눈을 감고 음식맛을 음미하시는 아버지까지. 누군가 대화의 물꼬를 트지 않으면 정말 생존을 위하거나 영양소 섭취만 하는 자리가 되고 만다.

 

 

부끄럽지만 제대로 대화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직장 상사나 심지어 처음 보는 거래처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억지로나마 웃는 낯으로 말 잘하면서 정작 내 편 품으로 돌아와선 입은 무거워지고 피곤함의 아우라만 풍긴다. 편한 사이다 보니 염화미소(笑)격으로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지만 생각해보니 그건 이기적인 마인드인듯 싶다. 사회생활의 고됨이 주는 영향도 있겠지만 날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위해서 또 나를 위해서라도 그건 핑계라는걸 자각해야 한다. 부모님, 친구, 연인과의 대화 자리에서 더 집중하기.

 

대화의 시작은 '듣기'란다. 좀 더 멋진 말로는 경청.

거울을 볼 때마다 보이는 귀는 둘이오 입은 하나다. 말을 한마디 뱉을거면 두마디는 듣고 나서 하라고 그런건가? 박수도 양손이 부딪쳐야 하듯 대화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야 비소로 성립한다. 잘 듣는 사람은 대화의 맥락도 잘 파악할 수 있고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말을 할 수 있다. 제대로 들어야 제대로 대화한다. 그게 쉽지가 않다. 회사에서도 잘 들어야 생활도 업무도 잘할수있다. 선배들은 후배가 두번 물어보면 정색한다. 말 많은 애도 싫어한다.

결국 가정의 행복과 일터에서의 평안을 위해서라도 잘 듣는게 유리하다.


인사이동덕에 부모님과 모처럼 푸근한 대화를 나눴다. 어머니는 유연하게 대화를 이끄셨고 아버지는 연륜에서 배어난 사회생활의 지혜를 전해주셨다. 내겐 대화가 필요했다. 어쩌면 두 분에게도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고민 상담해줘서 고마워 아들."

"몇 년만 현실적인 고민도 안고 지내봐라. 그리고 서른 다섯이 되면 커리어나 급여에 신경 쓰지 말고 정말로 너 하고 싶은 걸 하거라. 아빠가 도와줄게."

 

정말로, 우리에겐 대화가 필요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