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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51 세번째 휴가, 그 둘째날

여름을 갓 보내고 휴가길에 올랐다.

직장인이라면 응당 받는 권리 중 하나인 하계휴가. 공식적인 휴가기간은 5일이지만 앞뒤에 낀 주말에다 연차까지 더해서 총 11일을 마련했다. 휴가로 10박 11일을 보낸다니 친구들이 그러더라. "야, 아무리 휴가래도 그렇게 쭉 쉬어도 되는 거야??"

답했다. "내 휴가 내가 쓰는 건데."

 

다들 나를 본받아서 챙길건 챙기도록 하자. '아~ 우리 회사는 보수적이고 군대문화라 그럴 수가 없네요..' 하는 친구들, 우리 대에서 악습을 끊어줘야 후배들이 다니기 좋은 회사, 내 아이들이 살기 좋은 사회가 된다는 걸 잊지말자. 곰곰히 생각해보니 수십년간 행해온 사내 관습이나 분위기를 바꾸긴 쉽진 않을 것 같다..만 그래도 해보자!^^

 

2016년 중반에 입사해 어느새 세번째 하계휴가를 맞이했다.

첫번째 년도엔 신입사원 그룹 및 계열사 연수를 마치고 일괄적으로 정해준 날짜에 쉬었다. 그땐 딱히 어딘가에 갈 계획을 짤 시간도 부족했고 취업과정에서 고생했으니 그냥 푹 쉬고 싶었다. 고향으로 내려가 집밥을 먹으며 몸과 마음을 달래는 휴식시간을 가졌었다.

두번째 휴가를 보낸 작년엔 드디어 가보고 싶은 곳이 생겼으니, 런던과 에딘버러 땅을 밟는 영국 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올해는 이탈리아로 정했다.

 

 

이탈리아에 가리라고 마음먹은건 아마 5월쯤이었던 것 같다.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여행을 그리 즐기진 않았었다. 노는 것은 좋으나 현실에 복귀할 때의 그 공허함과 아쉬움 혹은 그리움 속에서 허우적대는게 다소 거북했었다. 대학교 졸업을 1년 남겨둔 시점이었던가? 지루하고 팍팍한 현실에 치여 허우적대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차라리 휴가지에서의 행복한 기억 속에서 그러는게 차라리 낫겠다 싶었다.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대신 제대로 떠나고 싶어졌다. 느끼고 싶은 감정과 받고 싶은 영감, 또 색깔있는 여정을 위해 전보다 더욱 신중해졌다.

 

2015년 미국 여행의 주제는 '가지 못한 길에 발 디뎌보기'.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과 실리콘벨리, 햇살 좋고 활력 또한 넘치는 미서부에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동부 지역까지 가로지르고 왔다. 친구들과 유학시절의 값진 인연들 덕에 생에 대한 의욕으로 마음이 풍족해지는 시간이었지.

작년에는 회사 동기형과 함께 영국을 다녀왔었는데, 그 땐 초등학생 시절을 넘어 다시 한번 해리포터에 빠져있었던 시기였다. 가는 김에 네스호의 괴물로 유명한 스코틀랜드 산악지역인 하이랜드까지 찍고 왔더랬다. 여행의 목적은 '판타지와 동화적 감성의 충족'.

두 여행의 공통점은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서의 내 행보가 더욱 설레고 기대됐었다는 점. 가슴이 두근댔고 에너지가 충만해졌었던 기억이 난다.

 

올해 여행 타이틀은 '르네상스와 천재들의 숨결 느껴보기'로 준비했다. 이십 대의 마지막 여행이라 더 의미가 있는 이번 휴가. 건배사에 통달한 대한민국 프로 직딩답게 구호 외치며 출발한다!

이천십팔 이탈리아!

 

 

 

 

어제 베니스 마르코폴로 공항에 도착했으니 오늘은 2일차다.

베니스에서부터 피렌체, 로마를 거쳐 폼페이와 아말피 등 남부지역까지 돌아보는 이번 여행.

여행지에선 최대한 보고 듣고 만지고 먹고 느끼려 한다. 스마트폰 화면보단 현지 사람들의 옷차림과 표정을 보고, 이어폰 대신 아이들 웃음이나 종탑 소리를 귀에 담는다. 책이나 셀카봉을 손에 잡기보단 거리의 조형물과 건물 감촉 하나하나를, 김치나 라면도 좋지만 로컬푸드를(설령 입에 크게 맞진 않더라도 몇 번은) 씹고 뜯고 맛보고. 그리고 대한민국 직장인 개인의 고민보단 세계인으로서 발이 닿은 여행지의 정취를 탐한다. 물론 이 수칙들을 오롯이 지키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나름의 원칙을 품에 안고 떠난 여행은 기대보다 많은 것을 준다.

 

베니치아에서의 1박2일 후 기차에 올랐다.

이탈리아 슈퍼카로 유명한 페라리에서 만들었다는 이 민자고속철도 이딸로(Italo)는 '페라라'라는 이름의 지역을 넘고 '볼로냐'를 지나 우리의 목적지인 '플로렌스'로 향했다. 기차가 출발하고 경유하여 도착하게 되는 이 네 개의 도시 - 베네치아(베니스), 페라라, 볼로냐, 플로렌스(피렌체)는 여행 전부터 한번쯤은 들어본 곳들이다.

 

셰익스피어의 5대 희극 중 하나인 <베니스의 상인> 동화책으로 처음 접한 곳, 베니스(Venice).

유년시절 볼로냐 스파게티를 생각하기만 하면 군침 돌며 귀에 익어버린 도시 볼로냐(Bologna).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실제 볼로냐에는 볼로냐 스파게티가 없다는 사실은 나름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대학교 영문과 수업 '영국시와 사회' 중 읽은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My last Dutchss> 에 등장한 페라라(Ferrara).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인 차이코프스키의 현악 6중주 <플로렌스의 추억> 때문에 더욱 가보고 싶어진 플로렌스(Florence).

한땐 생소했지만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장소들이 앞을 스치고 있다. 뉴런이 시냅스를 형성하며 이어지듯 과거의 기억이 하나둘씩 현재와 엮여 간다.

 

 

오후 8시 30분, 피렌체 산타모니카노벨라 기차역에 도착했다.

12시간 비행을 거쳐 곧바로 시작된 베니스에서의 1박 2일 일정이 역시나 노곤킨 했는지 동행한 회사 동기 둘은 단잠에 빠져있다. 낯설고 울퉁불퉁한 길 위를 캐리어까지 끌며 걸으려니 제법 힘이 든다. 그나마 포장이 좀 더 된 차도로 슬쩍슬쩍 걷자면 뒤에서 차가 경적을 울린다. 짜증낼새도 없이 낑낑대며 인도로 짐을 끌어올리는 청년들. 그러나 눈과 입은 웃고 있었으니, 드르륵 대는 바퀴음 장단에 맞추어 다박다박 걸어간다. 이따금씩 턱에 걸리고 구멍에 빠지면서도 처음 디딘 거리에 흥분했는지 바퀴도 신명나게 굴러간다.

 

10분쯤 걸어갔을까? 앞에 붉으스름한 갈색 돔이 모습을 드러내며 커다란 건축물이 나타났다.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다른 이름으로는 피렌체 두오모. 이탈리아에선 성당을 통칭해 '두오모(Duomo)'라고 부른다는데, 그 중에서도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의 영향 때문일런지 피렌체의 그것이 유명하다.

 

 

그림 같은 성당 앞에서 미국 서부 개척시대 포장마차처럼 열심히 달리던 캐리어가 멈춰섰다. 약속이나 한 듯 우리 셋은 위를 올려다봤다. 방금까지 졸림 가득했던 동공이 활짝 열렸다. 한 눈에 가득 채우려면 더 크게 떠야 한다. 맨들하거나 단색이 아닌 수많은 조각상과 새김들로 감싸진 벽면이었는데, 놀랍게도 가까이서 보니 조각인지 알았던 대부분이 그림이었다. 피렌체의 첫 야경을 뒤로 하고 숙소로 들어와 페로니 맥주 반주삼아 늦은 저녁을 하고 침대에 기댔다.

 

2018년은 아직 3달 남짓 남았다만 총 10박 11일간의 이번 휴가는 아마도 올해 내가 떠난 가장 긴 여정이 될거다. 해가 가기 전에 퇴사하지 않는 이상은^^ 이십대를 마무리해가는 시점, 여독(旅毒)에 취기까지 몰려오는 외국의 밤에서 게다가 아직 잠을 청하기엔 이른 애매한 시간에 누워있자면 자칫 센치해지기 쉽다.

 

'나는 지금 어디쯤 있는 걸까?'

좋아하는 영화 <라라랜드> 에서 주인공들은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0.1초만에 답을 내린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보자.'

 

 

피렌체의 상징인 두오모의 아름다운 돔은 150년의 기다림 끝에 지어졌다고 한다. 고대 로마의 판테온 양식을 계승했으며 역사상 최초의 팔각형 돔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기다림의 미학을 보여준 사례로도 인상 깊다.

 

1296년경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지어나간 성당. 그러나 당시 옆면 벽이 무너지지 않게 돔으로 맨 위를 덮을만한 기술이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졌을까? 보통은 불만족스럽겠지만 돔이 아닌 다른 형태로라도 지붕을 잇거나, 아니면 후에 다시 손 댈 용기가 없어 아에 미완성인 상태로 둘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피렌체 사람들은 흘러가는 대로 기다렸다. 언젠가는 완성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과 함께. 그 염원을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양식과 원근법의 창시자인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가 이어받아 완성시킨 것이 현재 피렌체의 상징인 두오모 팔각돔이다.

 

도시에 낭만을 더하기 위해 누군가가 살짝 바람을 불어넣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만 적어도 건축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그렇단다. 

 

 

내일은 그 두오모의 463개 계단을 오를 예정이다. 좁은 통로를 벗삼아 무한히 반복될 것만 같은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다 보면 갈색 지붕이 꽃처럼 피어난 피렌체 시내가 날 맞이하겠지.

공교롭게도 피렌체의 별명은 '꽃의 도시(Citta del Fiore)', 그리고 영문식 지명 플로렌스(Florence) 역시 '꽃의 도시' 라는 뜻의 옛 도시명 플로렌티나(Florentina)에서 유래되었단다.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뜻도 '꽃의 성모 마리아' 라니, 물들어 만개한 꽃밭을 감상할 생각에 벌써부터 설렌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그 중에서도 3대 천재로 회자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몸 담던 도시 피렌체. 꽃과 천재의 도시 그 가운데 내가 있다. 이곳에서 나도 흘러가는 대로 가보려고 한다. 왠지 모르지만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다.

 

세번째 휴가의 둘째날이 저물어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