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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50 사람은..향기를 남기고

끝날 것 같지 않던 여름이 어느새 끝자락에 접어들었다. 100년 만의 무더위라던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지방근무 중인 대구는 여름이면 아프리카로 변한다. 작년 여름만 해도 서울이나 부산이 확실히 덜 더웠었는데 올해는 거기나 대프리카나 별반 차이를 못 느끼겠더라. 뭔가 이득 본 것 같으나 결국엔 손해인듯한 묘한 기분이다.

 

악명 높은 서울의 지옥철. 그 중에서도 여름날 출퇴근시간은 특히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디서 시작된지도 헷갈릴 정도의 긴 줄을 하염없이 기다리다 열차문이 열리면 코앞에서 휘몰아치는 더운 바람에 얼굴이 찌푸려진다. 분명 내 돈 내고 탑승했건만 어디 잡혀가는 포로마냥 앞 뒤 양 옆이 모두 포위되었다. 모두들 다닥다닥 붙어버린 테트리스 블럭이다. 인파가 발산하는 열기에 휩싸여 있자면 이게 바로 열섬현상인가 싶으면서 간밤에 에어컨을 특급냉방까지 가동하고 잔 어제의 나를 반성한다.

 

 

더위를 동반한 북적거림에 첫 5분은 늘 불쾌지수가 높지만 그 고비를 넘기면 제법 참을 수 있다.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라 자찬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무더운 날에도 양복을 갖춰 입은 아저씨, 나름 쿨비즈로 셔츠에 면바지를 입은 젊은 직장인 오빠, 교복을 입은 학생, 하늘거리는 원피스 차림의 친구, 무명 저고리를 정갈히 입으시고 손부채질 중이신 할아버지. 날이 더우니 대중교통에선 서로간 조금씩의 공간은 띄어줬음 좋겠다만 여건이 안좋으니 이해합시다(혹은 체념하자).

 

배려심 넘치는 따뜻한 도시 남자의 정서를 확립했다 싶었는데 뭔가가 훅 치고 들어온다. 마치 방안에서 초집중해서 게임하다가 10m 밖의 부엌에서 끓어가는 김치찌개를 감지했을 때와 동일한 각성 상태랄까?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르는 쥐 떼처럼 코에서부터 잡아끌린 감각은 이내 눈으로까지 연결된다. 보이지 않으나 느낄 수 있는 이것은 '향', 혹은 '냄새' 란다. 어느 영화에서는 손이 눈보다 빠르다는데 여기선 눈보단 코가 빠른가 보다.

 

 

 

 

추억의 발동조건은 감각의 연상이다. 그 언젠가 보고 듣고 만지고 먹고 맡았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10년 전 놀이터에서의 어느 날도, 지난 주 회식자리에서의 헤프닝도 떠오른다. 가끔씩 '푸른 퇴근 종소리', '따끔한 팀장님의 눈빛'과 같은 감각의 전이도 발생하는데 이런 순간은 특히 더 오래 생각난다. 감각은 기억상자를 열어주는 열쇠다. 사람마다 오감(五感)중 특히 민감한 하나가 있다는데 나는 아마 후각이 아닐까 싶다.

 

서울에선 대중교통을 이용했었으나 지역으로 발령받아 내려오며 자동차를 구매했다. 어색해서 그리고 운전이 미숙하다면서 필요할 때만 운전했었지만 어느새 출퇴근을 넘어 동네 은행을 갈 때도 차를 몰고 가는 정도에 이르렀다. 포켓몬스터 뚜벅쵸 마냥 잘도 걸어다녔던 과거를 지나 이젠 10분 거리만 되도 차에 오른다. 좋은 일인지 안 좋은 건진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자가용을 타고 이동할 땐 나 혼자다. 버스나 지하철 마냥 옆자리에 모르는 사람이 앉아있지도 서있지도 않은 완벽한 나만의 공간이 보장된다. 지금은 옅어졌다만 차안에선 방향제 향이 난다. 땀냄새나 찌든내가 아니라 향기가 난다. 차를 산 뒤 가장 만족하는 순간이다.

 

회사 여기저기서 풍기는 향이 다르다. 언제나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 후배. 깔끔한 이미지에 방점을 찍는 건 바로 좋은 향기다. 도급업체 여사원분들이 모여있는 사무실 출입문엔 방향제가 걸려있다. 지나갈 때마다 꽃향기가 난다. 프라이데이 나잇 다운타운을 연상시켜주는 선배도 있다. 술냄새가 폴폴 나는 것이 금요일 강남 술집에 앉아있는 것 같다. 어디서 담배 쩐내도 난다. 매캐한 담배연기도 별로지만 손가락과 옷에 배어 농축된 냄새는 악취 수준이다.

 

 

홍차를 우려 사무실 책상에 올려두고 있다. 없으면 탕비실에 있는 보리차나 메밀차 티백이라도.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느라 지친 눈을 감고 목을 뒤로 쭉 젖혀 근육을 풀어주면서 은은하게 퍼지는 향을 맡고 있자면 머리가 맑아지는 것이 거의 아로마 테라피 수준이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기며 나는 밥을 잘 남긴다. 농담이고 더운 여름날 누군가에게 냄새 보단 향기를 남긴 사람으로 기억되는 게 좋지 않을까? 다시, 표범은 레오파드 스커트를 남기고 사람은 향기를 남긴다.

 

창문을 열면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은 더위가 지나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얇은 린넨 이불을 솜이불 마냥 꼭꼭 덮고 잔 어젯밤엔 가을이 실감났다. 여름은 끝났고 그 해 누군가의 향기도 기억됐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