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입학할 즈음 새 책상을 샀다. 책장에 서랍장까지 원목으로 제작된 반일체형이었는데, 그 꼭대기엔 미키마우스 로고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90년대 초 유치원생들의 대통령이었던 디즈니 캐릭터들이 휩쓸던 시기였고 그중에서도 센터격인 미키마우스 책상을 난 가졌었다. (당시 사촌형 방에 있던 이 책상에 꽂혀 사달라고 졸랐었다) 아무튼 이 책상에서 공부도 하고, 먹고, 또 졸고, 뭔가를 해왔다. 자그마치 22년하고도 8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조금씩 갑갑해지던 책상은 고등학생 땐 비좁아졌다. 더 크고 번듯한 밤색 책상이 방에 놓여졌고 손때 묻은 미키 책상은 동생 방으로 옮겨졌다. 새 책상에 적응했지만 희한하게 옛날 책상에 앉아보고 싶더라. 동생이 집을 비운 틈을 타 책상에 앉았다. 작고 좁다. 그치만 시골집에 돌아온 것 마냥 아늑하다. 왕수학 문제집을 풀다가 막혔던 머리를 뚫듯 콕콕 찍은 샤프 자국이 보인다. 어린이 잡지를 보다 따라 그린듯한 서세원 캐리커쳐도 있다.
개구쟁이 몸에 난 생채기 같은 흔적을 하나하나 볼 때마다 옛날 생각에 잠긴다. 공부빼고 다 재밌는 시험기간에는 더더욱. 새로운 책상도 좋았지만 미키 책상 특유의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나뭇결에 이끌려 고향 친구 만나듯 들르곤 했다.
대학생이 되며 집에서 나와 살게 되었다. 그래도 본가에 내려올 때면 자연스레 이 책상 옆에 가방을 풀고 앉아 짐 정리를 했다. 군 입대를 하고 복학을 하면서 꽤나 시간이 흘러갔다. 직장인이 되었다. 신입사원으로 지방근무를 하게 되어 본가로 다시 내려왔다. 기존의 내 방은 어머님이 다른 용도로 쓰고 계셨기에 대학교 진학으로 타지 생활 중인 동생 방을 배정받았다. 그리하여 미키 책상은 다시 한번 나의 주둔지가 되었다.
다시 앉게된 책상은 정리가 필요해 보였다. 책장에는 오래된 공책이 가득했다만 선뜻 손을 대기가 귀찮았다. 빛과 열기를 사정없이 뿜어내는 햇볕을 배경으로 맴맴을 넘어 왱왱 울어대는 매미 때문에 더.
어느 토요일은 아침부터 비가 추적댔다. 매미 소리가 멈추니 덩달아 시간도 멈춘 것 같다. 침대에 멍하니 걸터앉아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정리를 시작했다. 구석에서 공책이 한움큼 잡혔다. OO초등학교 이름이 붙은 공책엔 '일기장' 이란 글자가 대문짝만하게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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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1월 6일 일요일
제목: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오전 11시 36분쯤에 청하에 있는 보경사란 절에 등산을 하러 아버지와 함께 갔다. 주차비로 2000원을 내고 입장료로 3500원을 내고 보경사가 있는 산으로 올라갔다. 처음에는 힘이 하나도 들지 않아서 날듯이 올라갔지만 중간쯤 가니 조금씩 힘이 들기 시작했다. 중간에서 조금 더 가니 지치고 힘이 들어서 물도 많이 마셔야했고 조금이라도 쉬고싶었으며 도중에 내려가고도 싶었다. 그러나 체력단련을 조금이라도 더 하고 싶어서 모자에 나뭇잎을 고정시킨 뒤 걸어가며 오리 울음소리도 내고 인디언 소리를 내면서 신나게 갔다.
아버지께서, "저기가 바로 정상이야. 저기에는 암자가 있는데 우리 올라가서 점심 먹자." 하고 말하시니 나는 더 기운이 나서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빠른 걸음으로 갔다. 정상에 있는 암자에 다다르자 나는 기분이 너무나 좋았고 점심을 먹으니 맛있기도 했고 바람이 불어 시원하기도 했다.
정말 그말이 맞는 것 같다. 바로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라는 말이다. 앞으로도 매주 일요일마다 아버지를 따라 산에 올라가겠다. 힘든 일을 많이 겪고 나면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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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9월 9일 일요일
제목: 일어나기 싫어!
일요일 아침, 나는 침대에 누워 잠을 자며 쾌락을 즐기고 있었다. 시간은 8시 10분. 일찍 일어나는 평소와는 달리 일요일은 엄청난 잠을 자는 나. 평일날 힘들게 학원 오락가락하고 급하게 식사하다 캑캑거리며 물을 마시던 악몽같은 일주일을 다 보내고 드디어 휴일을 맞았다.
침대에 누워서도 '오늘은 어디로 놀러가지? 재미있는 곳에 갔으면 좋겠다. 아참! 오늘 친구 생일이지? 빨리 가야겠다!' 머릿 속에선 토론을 하고 있다.
아는 친구 생일잔치에 가려고 몸을 일으키려해도 내 몸은 마치 기름칠 안한 로봇처럼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는다. 간신히 온 힘을 쥐어짜 일어나려고 해도 우두둑하는 뼈소리만 날 뿐, 흑흑흑.. 친구 생일은 시간땜에 가기 틀렸고.. 아침공부하려면 짜증나고 그럼 어쩔 수 없다! 방법은 단하나! 편히 자는 거다.. 쿨쿨쿨 Zz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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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이면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일기의 내용이나 문장을 보고 제법 놀랐다. 기억 속 초등학생 나는 그저 철없는 꼬마였는데 글엔 당시느꼈을 삶의 기쁨과 깨달음, 심지어 나름의 애환까지 배어난다. 지금보다 정신연령이 되려 높았을 수도 있으려나?
OO초등학교 3학년 3반 36번 일기장 수만 해도 8권인 걸 보면 자의든 타의든 일기를 매일매일 그리고 꽤나 오랫동안 써왔나보다. 유치원 그림일기부터 초등학교 저학년용 20칸형 일기장, 고학년 때의 줄 일기장, 중학생의 스프링 일기장까지. 몇 년 전에도 초등학교 1학년 시절 일기장을 본 적이 있었는데 8살 특유의 귀여운 생각이 담겨있었다. 3학년이 되며 글에서 웃음기는 다소 빠졌으나 분량이 길어지고 주제도 다채로워졌다.
어릴 적 일기에는 유난히 우리 가족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 혼자 어디 잘 돌아다니지 못할 나이었으니 부모님께서 자주 챙겨주셨을거다. 당시 내 삶의 주된 반경은 아버지, 어머니, 동생의 주위 정도였다. 지금의 그것은 그때보다 몇 십배는 커졌겠지만 알 수 없는 결핍감이나 공허함을 느끼는 순간이 역시 몇 십배는 더 있다. 그러다보면 가족들의 이야기만으로도, 식구들과 함께 웃으며 보낸 기억들로 꽉꽉 차던 어린 시절의 하루가 그리워진다.
짝다리 짚고 서서 일기를 읽다 아예 자리 잡고 앉았다. 머리는 까치집에 옷은 잠옷 차림으로 웃음기와 진지함을 반씩 머금은 얼굴로. 찍히고 패이고 또 손때 묻은 책상 자국들이 눈에 들어온다. 스물 둘의 책상에 기대어 있는 스물 아홉살의 나. 주위엔 우리의 조각들이 있다.
오래된 책방 냄새가 나는 책상 한 켠에서 후두둑 대는 빗소리를 벗삼아 옛 일기를 읽고 있자니 퍽 운치 있다. 색이 바랬어도 이미 한참 바랜 종이. 그 곳에서 기억이 하나 둘 피어난다. 비가 그치고 매미 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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