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48 회식에 관하여

"... 그래서 오늘 엄청 피곤해서 죽는지 알았다니까요? 어휴 회식 완전 겁나 싫어."

 

밥그릇은 달그락대고 숟가락은 짤랑대는 와중에 쩌렁대는 목소리는 식탁 위 물방울을 울렸다.

어제는 회식날이었다.

 

아버지는 TV를 보고 계셨고 어머니는 막 식사를 마친 식탁을 정리하고 계셨다. 안 그래도 더운 날씨인데 부엌은 더 후끈거렸다. 거실을 바라보던 선풍기 머리를 부엌으로 돌리고 물 한 잔 컵에 따랐다. 불길에 물 뿌리듯 꿀꺽 원샷 후 아쉬운 나머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사원들은 이따금씩 맞장구나 쳐주면서 서로 눈치나 보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는지 집엘 안가요! 집엘! 뭔 2차에 3차야, 도로도 아니고. 어? 가정도 있는 사람들이 말이에요!"

 

설거지하시는 어머니 옆에서 회식의 불필요함과 무분별함을 부르짖는 내 목소리 사이로 아버지의 나즈막한 음성이 덧씌워졌다.

"그래도 회식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이 꽤 있다.."

거실을 바라봤다. 아버지께서는 언제 그러셨냐는 듯 눈을 화면에 고정하신채셨다. 쏴아아- 물소리에 부엌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니 어머니 얼굴도 너무 차분하신 상태다. 마치 회식과 관련된 헤프닝이 익숙하단 마냥.

 

 

기대만큼 반응이 나오지 않자 머쓱하게 방으로 향했다. 사회초년생에게만 문제로 치부되는 이슈인걸까? 리드미컬하게 부딪히는 식기 마찰음 배경에 아나운서의 모노톤 목소리가 얹힌 역설적인 공간을 차단하듯 문을 닫았다.

 

'.. 다음 뉴스를 말씀드립니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일부 시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회식시간도 업무시간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딸깍.

 

 

 

 

다행히도 우리 팀은 회식이 빈번하진 않은 편이다.

나름 사원급의 의견을 존중해주시는 팀장님이 계셔서인지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 임원이 방문하면 추가로 또 한 번.

회식 자리도 그렇게 힘겹진 않다. 술을 많이 권하지도 않고 어지간하면 팀장님이 먼저 저녁 10시쯤엔 귀가하신다. 남은 사람들끼리 그 뒤로 또 한 차례 더 진행해서 그렇지.

꽤나 편하게 지내면서 왜 이런 말을 해대냐고?

 

동기 중 하나가 이런 소릴 하더라. '회식이 재미있어졌다면, 나 설마 꼰대야??'

귀여운 생각이다. 응~ 젊은 꼰대라고 불러줄게^^

회식자리에서 흥이 오른다면 그건 단지 술기운 때문만은 아닐거다. 회사라는 어른들의 집단공간에서 어느정도 내 자리를 다져놓았다는 자신감과 더불어 그속에서 어떤 형태로든-업무적 혹은 인간관계적-성과를 내고 있을 것이란 기대감도 한 몫했으려나? 회사생활 잘하고 있다는 거지, 뭐.

2년이 넘게 출근하며 회식이 조금은 재미있으려던 적도 간혹 있었다. 위에서 제시한 논리에 따르면 나도 회사생활 잘하고 있던 때가 몇 번은 있었나보다.

 

대개 회식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업무의 연장'이다.

작년 팀의 회식문화는 아직도 생생하다. 오전까지 아무 말씀 없으시다 점심쯤 그날 저녁에 회식을 할거라 통보하시던 팀장님에 대한 추억이랄까? 몸이 좋지 않아 불참해도 괜찮겠냐는 뉘앙스를 조심스레 풍기면 '회식도 업무의 연장인데..' 혀를 끌끌 차시던 분이셨다. 술잔을 왜 비우질 않냐고 추궁하는 점검자요, 주변 선배들의 술잔은 항시 차있도록 긴장하라는 조언자 역할까지 소화하시던 회식자리의 리베로였다.

당시 맞선배는 늘 팀장님 옆자리에 나를 앉혔고 그는 이를 '마크하기'라고 불렀다. 술을 많이 먹었으나 좀체 취하질 않았고 취해선 안됐다. 회식날이 다가오면 어찌해야 할지 전날 밤부터 고민할 정도였다. 단 한번도 도망하지 못하고 결국 끌려갔었지만.

 

 

반대로 회식의 주체가 된 경우도 있다.

업무 특성상 관리하고 있는 직원의 수가 스물 남짓이다. 이들이 회식을 하고 싶다고 요청하면 이따금씩 해준다. 서로 다른 퇴근시간으로 일정을 맞추기가 힘들다는 것이 자주 회식하기 힘든 표면적 이유. 아무튼 회식자리서 그들은 몹시 즐거워한다.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고 또 술을 따른다. 직원들의 사기 충전을 위해 버티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밤늦게 시작된 파티는 끝날 줄을 모른다. 새벽 2시경에 몇 시간 후 출근을 해야 하는 입장이라 들어가보겠다니 굉장히 서운해들 하더라. "이제 시작인데 어딜 가십니까.."

 

회식자리의 호스트로서도, 멤버로서도 나는 힘들어했다. '시간이 아깝다'라는 생각이 두 상황을 꿰뚫는다.

퇴근 후엔 보통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편이다. 헬스장에 가서 이어폰을 끼고 운동을 한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침대에 삐딱하게 기대어 웹툰을 본다. 이따금씩 인류와도 소통하는데, 입술보단 손가락을 움직여 텍스트를 주고 받는 정도랄까? 퇴근 후 시간을 활용하면 최대 자기계발에 최소한 휴식은 취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산업역군으로서 온종일 몸 바쳐 일하고 남은 몇 시간은 내게 쓰련다 싶지만 회식에 참석하면 그마저도 불가능하게 된다.

 

보통의 회식은 늘 어떠한 목적과 명목을 가지고 있다.

가령 상반기 팀 실적 공지라거나 조직 인사이동에 따른 자리라거나. 가장 보편적인건 월 마감 회식이겠지. 초반 1시간 이내로는 가볍고 시덥잖은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러다가 술이 좀 들어갔다 싶으면 의례 나오는 업무 토크는 식당을 제 2의 사무실로 만든다. 결국 회식은 회사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마련되는 행사일진데, 팀장님의 치고 들어오는 타이밍이나 분위기 조절 스킬을 관찰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회식 후 피로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씻고 바로 침대에 누울 때면 '다시는 회식 가나 봐라.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빠지고 만다!'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회식장소에 도착해서 자리에 눌러 앉아 술을 마시고 미소 지어가며 대화를 나눈다. 언제나 그랬듯 팀장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팀웍과 소속감을 느껴가는 쇼윈도(show-window) 화합의 장이다.

억지로 회식장소에 도착해서 억지로 자리에 눌러 앉아 술을 마시고 억지 미소 지어가며 대화를 나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직장인이니까. 회사원이니까.

 

요즘 동기들이나 선배들을 보자면 상당수가 회식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대화할 때나 메신저에선 다들 회식 싫다고들 하지만 정작 술자리에선 즐겁게 시간들 보내더라. '미친 ㅋㅋ 뭐가 재밌어하는 거야! 그냥 맞춰주는 거지!' 하며 치는 손사레에도 여유가 묻어나는 걸 보면 어느새들 직장인 다 됐네 싶다.

회식을 즐길줄 아는 레벨이 되어 간다는 건 어찌 보면 긍정적인 일이다. 회식 참석에 대한 부담감도 줄어들 뿐더러 되려 업무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 수도 있다. 사내 인맥 구축과 정보 제공 등 야망남녀들을 위한 기회의 창이 열리기도 한다. 야합(野合)까지랄건 아니지만 예로부터 어떤 일은 밤에 이루어졌으니 말이다.

 

 

분야를 막론하고 활약하는 어느 학자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동시에 해내시나요?' 란 매스컴의 질문에 '..그리고 회식자리에 잘 참석하지 않는 편이에요. 미움을 좀 받긴 하겠지만요. 하하.' 라고 답했다. 임원이나 사장이 되고자 하는 야심이 있지 않다면 회식에 참여할 때와 그렇지 않을 경우의 편익을 따져볼 필요성은 분명 있다. 개인적으론 사내 술자리나 회식은 후폭풍도 컸고 여운도 길었으며 현자타임도 상당했다. 어느 책의 제목처럼 회식에 대한 견해의 차이는 나음보다 다름이라고 정리하며 넘어가련다.

 

어느덧 월말 회식이 우리를 기다릴 시기다. 빠지고 싶다만 빠질 수 있을런지 잘 모르겠다. 그래선지 마음의 준비를 조금씩 더 해두어야 할 것만 같은, 사회생활 대선배 아버지의 덤덤한 한마디가 상기되는 밤이다.

'그래도 회식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이 꽤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