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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김사자 』

[신입사원김사자] Ep.46 어느 재즈바에서 (부제: 현실과 진실)

"현실은 진실의 적이다."

스페인의 작가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 의 한 대목. 요즘 읽고 있는 물리학자 정재승의 신작 <열두 발자국> 에서 인용된 구절이다. 이 분의 글은 인문학과 과학을 놀라울만치 매끄럽게 연결내는데, 읽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관점으로 일상을 직시케 하는 맛이 있다.

 

미니 여름 휴가 겸 주말 찬스와 연차를 활용해서 제주도를 다녀왔다. 오션뷰가 기가 막히는 애월의 어느 카페에서 천천히 정작가님의 책을 읽어내려갔다. 걷다 보니 어느새 열 번째 발자국, '혁명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저녁에는 새로운 공간을 방문했다. 한림 부근에 위치한 '테이크파이브(Take 5) 재즈클럽'은 성인이 된 후 방문해본 첫번째 재즈클럽이었다. 조용하면서도 탁 트인 주변 경관에서부터 이어진 내부의 작은 공연단상과 조명은 재즈 특유의 그루브가 물씬 풍겼다. 오늘의 공연은 피아노-(콘트라)베이스-드럼의 재즈 피아노 트리오다. 살짝? 늦어 1부를 놓쳤지만 운좋게 2부 시작 전 브레이크 타임엔 도착해 2층 테이블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재즈. 뜬금없이 초등학교 586컴퓨터로 돌아가면서 하던 재즈잭 레빗 게임이 생각난다. 역시 초딩 시절 체르니에 질릴 때 치던 재즈 피아노 연주곡집이 아직 집에 있나 모르겠다.

연주자들은 앳되보인다. 한 명은 스무살에 나머지 두 명은 스물 셋-넷 언저리란다. 그들의 연주는 노련미나 섬세한 맛은 적었으나 듣다보면 흡사 나무가 자라고 이파리가 돋아나는 듯한 생명력과 떨림이 전해지매 다른 의미로 표현력 있다. 흔히 말하는 젊음의 패기란 걸까? 어르신들껜 가소롭게 혹은 귀엽게 보이시겠지만 이런게 느껴질 때면 눈 앞의 서른이 실감나.

 

 

연주가 시작되고 재즈 특유의 리듬감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음악을 듣다 말고 주변을 돌아본다. 그리 크지 않은 공간에 함께 자리한 이십 여 명의 사람들. 아빠로 불리울 아저씨의 눈 속엔 나팔바지를 입고 빵집을 누비던 장발의 총각이 있다. 여고 동창끼리 놀러오셨을짐한 아주머니의 머리는 박자를 맞추는 건지 달콤한 몽상에 빠져계시는 건지 이따금씩 흔들린다. 방학을 맞아 놀러왔을 대학생들은 동년배의 연주자 친구들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대학생 친구들의 들썩이는 어깨와 세상 진지한 표정이 따로 또 같이 보인다. 신이난 와중에도 진중하게 앙다물어진 입술은 이들이 지금만큼은 어린 대학생이 아닌 어엿한 뮤지션임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턱을 괴고 음악을 듣는다. 분명 눈도 감았는데 낮에 읽은 책 속에 인용된 한 문장이 앞에 있다.

 

"누가 미친 거요? 장차 이룩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는 이 내가 미친 것이오, 아니면 있는 그대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자들이 미친 것이오?"

 

 

 

 

재즈 감성 충만한 이곳에 앉아있자니 문득 떠오른다. 재작년 한국에 재즈 열풍을 불러온 영화 <라라랜드>.

남주인공 '세바스찬'은 재즈를 사랑하고 언젠가는 자신만의 멋진 재즈클럽을 차리는 꿈을 지닌 청년이다. 그정도의 연주 실력도 있는. 그러나 현실의 그는 레스토랑에서 시덥잖은 BGM을 까는 반일용직 피아노 연주자일 뿐이다. 어느 크리스마스 시즌 세바스찬은 '징글벨'과 같은 캐롤송을 무한 반복해야 하는 현실의 고통을 겪던 중 재즈 곡을 멋들어지게 연주하는 자신을 상상하다 실제로 폭풍 연주를 하고 만다. 고급진 음악으로 손님 귀를 호강 시켜준 그가 어떻게 되었냐고? 박수 갈채 대신 해고 통지를 받았다는:(

 

남들은 포기하고 안정된 직장을 찾아갔을법한 나이에도 그는 그렇게 팍팍한 현실에 저항하며 꿈을 품고 산다. 그런 세바스찬도 #럽스타를 시작했으니, 바로 배우 지망생이자 카페 알바생 '미아. 사랑도 끼리끼리 랬던가? 두 주인공 모두 이상적 모습과는 전혀 상관없는 생업을 이어가며 꿈을 좇는다. 글을 잠시 멈추고 생각해보자면, 그 둘의 그것은 분명 쉽진 않은 삶이다. 그런 내 의견을 코웃음치며 반증하듯 정말 재밌고 또 즐겁게 살아가는 주인공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신나는 장면과 아기자기한 노래 가득한 파트가 이 초중반일거다.

 

미아는 계속해서 연기 오디션에서 낙방한다. 결국 그녀는 1인극을 직접 연출 및 출연하는 새로운 길을 가기로 결심하는데, 다 쓴 대본을 남친에게 보여주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드디어 이 영화의 명대사가 나온다. (지극히 내 관점에서)

 

Mia: "Are people gonna like it?" (사람들이 좋아할까? ㄷㄷ..)

Sebastian: "Fuck' em." (싫어하고 자시고는 엿 먹으라 해~  뭔 상관들이래?)

Mia: "You always say that." (맨날 그렇게 말한다니깐ㅋㅋ)

Sebastian: "Cause I truly believe it." (뭐, 정말 그게 맞다고 보니깐.)

 

 

안타깝게도 1인극은 말 그대로 안타깝게 끝난다. 관객 몇 명정도의, 그마저도 졸고 중간에 나가는 수준의 눈물나는 폭망 수준. '대중의 시선'에서 그리고 '사회적 통념' 기준에선 실패한 경험이요, 작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의 엔딩에서 미아는 성공한 여배우가 되어있는데 아마 이 망한 1인극이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성공이라는 펜트하우스로 데려다주는 엘레베이터에 지하에서 탔음직한 일이랄까?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세바스찬은 흔들린다. 관객들도 정신 차리게 된다. 제목부터 연출까지 판타지적 요소 가득한 영화에 빠져있다 잊고 있었다. 결국 현실은 현실이라는 것을.

세바스찬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사회 속 본인의 사회경제적 위치에 대해 고민을 하다 꿈을 내려놓는다. 자기 말로는 잠시 동안이랬다. 재즈를 내려놓고 꽤 잘나가는 밴드에 들어가면서 미아와의 관계도 삐걱대기 시작한다. '그러니 이젠 그만'이라는 세바스찬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미아의 대립사실 그들의 관계는 시작부터가 불안정해보였다. 쾌활하고 웃음 가득한 바이브가 가득했지만 이건 10대의 사랑이 아닌 '어른'으로서의 연인관계였으니. 결혼, 또 그를 위해 충족되어야만 하는 보편적인 가치들과 같은 현실적 문제들로부터 마냥 자유로울 수는 없는 나이이니깐.

 

영화의 끝에서 결국 세바스찬도 꿈을 이룬다. 자기 이름을 딴 재즈클럽에서 연주를 하고 환호를 받는다.

그런 그의 옆엔 미아가 없다. 미아의 옆에도 세바스찬이 없다. 또다른 현실이다. 그런데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서 아련함과 동시에 만족감이 보이는 건 왜일까?

 

영화는 현실을 투영한댔다. 실제 삶에서 있음직한 일을 프레임에 담은 이야기다보니 우리는 영화를 보며 생각을 하게 된다.

생각하게 된다.

현실과 진실, 둘 중 뭐가 더 중요한 것인지.

현실이 진실을 간과하게 하는 건 아닌지.

그 진실이 정말로 진실인 건지, 아니면 현실이 사실 진실이었던 건 아닌지.

 

우리는 종종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아니, 반드시 몇 번은 놓이게 된다. 그 사이에서 고민하고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그때부터 서로의 삶은 달라지게 된다. <라라랜드> 속 또다른 매력적인 대사가 생각난다.

 

"People love what other people are passionate about. They remind people of what they forgot."

(사람들은 타인의 열정에 끌리게 되어있어. 잊어버린 자신이 열정을 떠올리게 해주니깐.)

 

재즈에 심취한 어린 연주자들의 합주가 들을수록 더 좋은 이유는 그들이 악기를 잘 다루어서도, 젊음의 패기로 똘똘 뭉쳐있기 때문만은 아닐거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진실의 문을 향하기 때문이 아닐까?

 

 

달 밝은 밤 창문 밖으론 야자수가 보이고 귓가엔 콘트라베이스 연주 소리가 묵직하게 울린다. 그리고 내일도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휴일이란다. 참으로 재즈가 잘 어울리는 몽환적인 밤이다.

1층 무대에서 열심히 연주 중인 대학생들의 홍조 띈 얼굴엔 여러 감정이 엿보인다. 즐거움, 설렘, 두려움, 기대, 그리고 불안.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된다. 나의 어린 날, 누군가도 날 보며 그런 생각을 했으리라. 이 친구들의 지금과 나의 그 시절이라는 두 시간대는 평행하다.

 

 

양 시간대 속 청년들에게 역시 책 속에 나온 <돈키호테>의 한 구절을 응원삼아 던지며 마무리 짓는다.

 

"현실은 진실의 적이오.

세상이 미쳐 돌아갈 때 누구를 과연 미치광이라 부를 수 있겠소? 꿈을 포기하고 이성적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미친 짓 아니겠소? 쓰레기 더미에서 보물을 찾는 것이 미쳐 보이오? 아니지, 그 상황에서 똑바른 정신을 챙기고 있는 자야말로 미친게지.

그 중에서도 가장 미친 짓은 이상을 외면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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