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이었을 거다.
핸드폰을 쥐고 꽤나 오랫동안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4개월이 지난 7월 중순, 대구로 향하는 KTX 안에서 역시 같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번호 지우는 중이다.
핸드폰 전화번호부엔 1001명이 저장되어 있다. 101마리 달마시안도 아닌 것이 많기도 하다. 급격한 기술의 발전으로 핸드폰 저장공간도 압도적으로 늘어나긴 했다만 1년에 두 번씩은 꼭 전화번호부 정리를 하고 있다. 삭제 1순위는 1년 이상 연락을 하지 않은 사람들부터 '굳이' 번호까지 저장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이들의 연락처다.
카페 소파에 비스듬히 등을 대고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연락처를 지우고 있는 나를 보며 누군가 한 마디 하더라.
"야 그렇다고 굳이 연락처까지 삭제할 필요가 있냐?"
고참 선배님들은 인간관계에 대한 명언을 곧잘 들려주시곤 한다.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된다."
"사람 사이 관계는 계산이 아닌 가슴으로 해야 한다."
좋은 말씀에 감사하다만 내게 전화번호부 정리는 정기적으로 꼭 필요한 일종의 의식이다.
머리 맡 스피커에선 이승철의 <인연> 이 흘러나온다. 인할 인(因)자에 인연 연(緣)자로 구성된 이름부터 아련한 단어 인연.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오늘 몇 명이나 처음 스쳤던 모습 그대로 다시 스쳐 지나가게 될 지 모르겠다.
핸드폰을 켜서 전화번호부를 눌러본다.
이름을 보는 순간 명확히 떠오르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같거나 비슷한 이름이 워낙 많으니 누가 누군지 제대로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경우도 있을거다. 과감하게 이름을 눌러 삭제해보려니 막상 잘 되지 않는다. '어쩌면', '혹시나', '그래도' 싶은 마음에.
**
어쩌면
혹시나
그래도
**
어쩌면 서로 연락하지 않은지 꽤 되어서 지금 당장은 되려 서먹할 수 있다. 상황봐서 연락해보긴 할건데 단지 지금이 아닐 뿐이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으니깐!
혹시나 나중에라도 필요한 연락처일 수 있다. 다가올 미래에 언젠가는 이 분 연락처가 도움이 될 날이 있을거다. 사람 일이란게 어찌될지 모르니..
그래도 전화번호 지우는 건 아닌 것 같다. 한때지만 교류했고 또 친분 다진 사람의 연락처를 삭제한다는 건 뭔가 마음이 불편한 일이다.
그땐 왜 그게 쓸데없이 멀리 내다본 것이었음을 알지 못했을까?
전화번호부에 저장된 연락처 대다수는 대학생 시절 저장된 것들이다.
그 때의 나는 거의 번호 수집가였다. 인맥의 나무는 스스로 자라지 않는다는 어떤 분의 말마따나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사람들을 만났다. 만나고 싶은 분이 있으면 바로 콜드 메일을 보내고 포럼이나 모임에 어떻게든 참석했다. 같은 또래보다는 저명한 사업가부터 연예인들의 연락처가 핸드폰을 메웠다. 그 시절 핸드폰 전화번호부는 나의 트로피이자 최종 병기였다.
직장인이 되면서 핸드폰에 저장된 전화번호가 늘어났다. 예전엔 스스로 원했었더라면 이젠 업무를 위해 저장한다. 어쩔 수 없는 수동적 수집가가 되었다. 사막월드 오아시스 지점의 사막여우씨를 만나 연락처를 저장한다. 같은 이름의 누군가가 이미 있다. 대학교 친구 걔인가 보다. 새로운 연락처엔 '사막월드 오아시스 지점'이라고 덧붙인다. 그런데 사막여우가 한 명 더 있다. 내 핸드폰 속엔 총 3마리의 사막여우가 살고 있는데 그 중 한 아이는 어디서 왔는지 모호하다.
문득 궁금해졌다. 과거로부터의 인연 중 지금까지 이어진 끈은 몇 개나 될까?
다시 번호를 지우고 있는 기차 안으로 돌아온다.
누군가의 연락처를 삭제하면서 잊기보단 복기(復棋)한다. 이름을 보고 떠오르는 그때 상황 속 과거의 우리를 제 3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마치 영화를 다시 볼 때마냥 느낌이 또 다르다. 줄어든 연락처 수만큼 얼굴을 주름도, 잡생각도 줄어들었다. 수많은 연락처를 굳이 삭제하노라 시간을 보내고 있자면 누군가는 쓸데 없는 짓이라고 혹은 오버 라고도 할거다. 틀림없이 좋은 점이 있다. 해보기 전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일단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교류했던 인사(人士)들의 연락처를 보던 추억팔이 소년은 이제 정말 팔려간다. 대학생의 낄낄대던 웃음소리가 묻어나는 번호도 사라져간다. 과거를 살라먹고 살아가는게 인간이라지만 가끔은 먹는 과정에서 발목을 붙잡힌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게임 할 때도 리셋 후 재도전시 더 잘될 경우가 있다. 새로이 시작하는 마음으로 초심을 잡기.
시간 관리 및 효율성 측면에서도 꽤 유용하다.
연락처 수가 적으면 그만큼 사람을 찾는데 걸리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우리가 찾는 애는 그 '박사슴'이지 이 '박사슴'이나 저기 '박사슴'은 아니지 않냐. 심심할 때 괜히 친구 목록을 휙휙 내려보며 낭비하는 시간도 줄어든다. "이 분은 요즘 어떻게 지내시지?"하며 혼자 마음 속 영상편지 찍는 일도 줄어든다. 쓸데 없이 낭비하는 시간이 적어지니 자연스레 내 시간이 늘어나게 된다. 맙소사! 이건 거의 마법이잖아?!
관계를 맺을 땐 보다 신중해져야겠다는 다짐도 한다.
넓고 얕은 관계일지라도 주변에 사람이 많다는 건 그저 좋은 일인지 알았다. 남들 다 제 몫 챙기는데 혈안일때 손해보면서 희생하는 것이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 관계를 형성하면 끊기는 더 힘들다. 그러니 진중하게 맺어야 한다. 가린다기 보다는 책임감 있는 만남을 해야지.
돌고 돌아 언젠가 다시 만난다는 그 말은 분명 맞을거다. 그런데 어차피 만날 인연이라면 굳이 억지로 붙잡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내 생각보다 그 쪽에선 나를 그다지 신경쓰지 않을 수도 있다. 친밀감은 감정이요 또 상대적인 것이니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 만큼 그는 나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추억이니깐? 그 추억, 나만 가지고 있는 미련일 수도 있다.
미련을 오래 간직하는 건 미련한 짓이다.
아쉽다면 삭히지 말고 바로 연락하기.
그저 흘러보낼 셈이라면 과감히 먼저 떠나보내기.
전화번호부를 정리하니 때를 민 것처럼 개운하다. 미드 새로운 시즌을 맞이하는 기분 마냥 산뜻하고 두근댄다.
예전엔 전화번호로 꽉 찬 핸드폰이 미덕이라 생각했었다.
주기적으로 연락처를 정리하게 되면서, 번호를 저장하는 것에 대한 무거움을 조금씩 느끼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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