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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44 현실 킹스맨: 겨땀 에이전트

KTX가 정차하고 문이 열린다.

땅을 향해 발을 내딪는 순간 무거운 짐을 진 마냥 몸이 휘청댄다. 마치 고중력 행성에 착륙한 우주인처럼 이 곳 대기에선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팔을 천천히 들어올려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백팩을 고쳐매고 힘겨운 걸음걸이를 한다. 에스컬레이터까진 고작 50미터 남짓해 보이는데 좀체 거리가 좁혀지지가 않는 것이 꼭 신기루 같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나를 스쳐 지나가시는 할아버지에 이어 총총 걸음의 어린이와 눈이 마주친다. "엄마, 저 삼춘 이상하게 걸어!"

 

여기는 동대구역. 여름철 이 곳에 타지인이 오면 흔히 겪는 현상이다. 중력이 다른 이 곳은 대구광역시, 동의어로는 대프리카라고 하지. 그 곳에 체류하는 나는 대프리카 거주민이다.

 

 

후덥지근한 6월을 보내고 본격적인 여름이 찾아오는 7월은 짧고 얇고 작은 옷 대잔치도 시작되는 계절이다. 누가누가 시원하게 입었나 경쟁하듯 거리를 둘러싼 것은 살 색의 향연이다. 하늘거리는 민소매 원피스의 여성 옆엔 바람 슝슝 들어오는 린넨 셔츠 차림의 남성. 그 뿐이랴? 드디어 발가락을 꼼지락 댈 수 있는 반(半) 맨발의 청춘들이 도시를 활보한다.

 

이 와중에 유독 보는 이의 가슴을 답답케 만드는 존재가 보인다.

하얀 와이셔츠에 수트를 갖춰입은 말쑥한 7월의 신사.

햇볕은 쨍쨍 보도블럭은 반짝커늘 몸들은 전장에 나가는 원탁의 기사의 갑옷처럼 꽁꽁 싸매여 있다. 이 더운 날 순례자의 길도 아닌 출근자의 길을 묵묵히 걷는 그들의 목줄기가 태양에 반사되어 빛난다. 땀에 젖어 촉촉하다 못해 흘러내린 앞머리는 최소 20분은 신경썼음직한 스타일링 작품 일진대.. 등에는 타원형으로 밴 땀이 보인다. 가슴팍 한 가운데 심폐소생술 압박 부분에도 역시 작은 원이 그려졌다. 미안하지만 제발 팔 만은 들지 마시길!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데 양복은 여름철 겨땀쟁이를 만들 뿐이다.

 

 

 

 

아침부터 방 안엔 열기가 맴돌아 창문을 연다. 하늘이 이글대는 것이 하루종일 꽤 더울 것 같다.

흰 티셔츠에 린넨 반바지 차림으로 나갔더니 부모님이 깜짝 놀란양 쳐다보신다. "얘, 그렇게 입고 출근해두 되니?"

그럼요, 자율복장제인데요~ 하면서도 사무실 앞에 도착하니 맨다리가 살짝 허전타.

 

찢어진 청바지나 슬리퍼만 아니면 뭐든지 오케이라는 회사 '복장 규정에 맞춰' 티셔츠에 반바지, 운동화 차림으로 출근했다.

날씨가 더워지니 하나 둘씩 반팔 티셔츠를 입더니 어느새 내가 사옥내 세번째 반바지 착용자다. 후배가 옆에 오더니 "선배님, 반바지 입어도 됩니까?" 한다. 슬쩍 본 녀석의 복장은 어제와 같이 정장에 구두다.

 

대학생 시절 인턴생활 중 면바지 차림으로 출근했다가 인사팀장을 마주쳤다. 꽤나 오랜시간 동안 복장 규정에 대한 훈계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대기업 정도 되는 장소에서 반바지를 입어본 건 나도 아마 오늘이 처음일 거다. 신입사원 땐 콜린 퍼스라도 된 양 수트를 풀셋으로 갖춰 입었었다. 말끔하고 각 잡힌 모습을 보이기 위해 굳이 재킷과 타이까지 착용했으나 더위가 슬슬 찾아오자 하나씩 벗어재끼기 시작했다. 린넨이나 시원한 소재로 만들어졌다는 소위 쿨비즈 룩'도 대프리카에서 더운 건 매한가지였다.

 

올해부터 우리 본부엔 자율복장제가 정착 됐다. 연초부터 시행되던 주 1회 캐주얼데이의 업그레이드 버전.

양복을 위 아래로 한 벌 입다 언젠가부터 재킷을 벗었다. 몇 달 뒤엔 정장 바지가 아닌 면바지를 입었고 구두 대신  단화나 운동화를 신었다. 어느새 아에 캐주얼 차림으로 다니다 드디어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 조합까지 등장했다.

 

처음 반바지를 입어 본 것이 대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그 전엔 맨 다리로 밖에 나간다는게 어색도 하고 왠지 모를 부끄러움도 들어 망설였었다. 어느 날 너무 더워서 어쩔 수 없이 반바지를 입고 밖을 나섰는데 왠걸! 천국이 따로 없었던 그 날의 기억.

 

 

맨 다리로 바람을 샥샥 가르며 사무실을 종횡무진한다.

복도에서 만난 외주업체 분이 "사자씨, 피서 왔어요?ㅋㅋ" 키득대며 지나간다.

팀 차장님이 지나가시며 "완전 DJ DOC 네~" 하시는데, 뭔 소린지 모르겠다.

회의실에서 마주 자리한 도급사 분은 "오늘 DJ DOC 야 뭐야?"

하 이 아저씨들 저게 뭔 소리래~ 했다가 굳이 설명을 듣고 서야 이해했다. <DOC와 함께 춤을> 노래 가사..

 

최근 국내 기업 복장규정이 많이 자유로워진 추세다. 동시에 윗 사람들의 인식 자체도 꽤 개선된 듯하다. 그래도 가끔은 옷차림으로 뭐라시는 분들이 계시긴 한데, 가령 내 후배더러 벨트하구 다녀라, 끈 없는 구두 신고 다니지 마라시던 옆옆팀 부장님^^

DJ DOC 삼춘들 노래처럼 청바지 입고서 회사에 가도 깔끔하기만 하면 괜찮을 텐데 뭐가 그리 신경쓰이시나 모르겠다.

빤스만 입던 잠수복을 입던 일만 할 수 있으면 큰 문제가 있나 싶던 생각이 드디어 사회에 정착되고 있나보다. 그래도 아직 다수 보수적인 기업들에선 정장에 셔츠 차림은 필수더라. 옷 입는게 별 것 아닌 것 같아보여도 매일이 반복되다 보면 체감되는 스트레스의 정도가 제법 크단다.

 

회사 마다 조직문화 개선 및 활성화를 위한 팀이 있다. 조직문화를 위해 힘쓰시는 건 잘 알지만 좀 더 크게 눈을 뜨고 귀를 열어 조직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했으면 좋겠다. 윗 사람들에 광 팔기 위해선지, 아니면 사람들 눈 의식하는 것인지, 그들이 늘 우선 하는 건 외부에서 보여지기에 좋은 회사 이미지 만들기 같다. 안에선 와이셔츠와 블라우스를 입은 형제 자매가 겨땀으로 힘겨워하고 있는데 말이다.

 

많은 팬들이 영화 <킹스맨> 에서 베테랑 요원 해리 하트로 분한 콜린 퍼스의 완벽한 수트 핏을 사랑했다. 그 멋쟁이 신사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트 차림으로 어떤 임무든 수행한다. 그러나 현실의 킹스맨들은 하루종일 수트를 착용하는 와중에 상당히 고통받고 있다. 겨땀에 무좀까지 지극히 사소하나 극히 현실적인 문제들로 말이다. 

 

킹스맨이 남극에서도 정글에서도 수트를 갖춰 입는 자부심을 보여준 것엔 분명 이유가 있을거다. (최첨단 땀샘 쿨링 시스템이 갖춰진 수트라던가..) 만약 복장에 대해 엄격한 회사라면 직원들이 언제 어디서든 신사 숙녀답게 입어야 하는 바에 대해 언제 어디서든 납득 가능케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당연히'라는 것은 없고 'OO인의 품위 지키기'나 '로열티'에 대해 부르짖을 필요도 없다.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요, 보상이 있다면 자연히 행동도 있을테니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