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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43 1등과 2등 사이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면 모두들 대회의실로 들어간다.

같은 부서의 전국 모든 팀들이 참석하는 화상회의를 위해선데, 시작과 끝에 늘 외치는 전사구호가 있다.

"반드시 1.등. 합시다!"

 

1등을 하잔다. 이 구호의 느낌은 흡사 회사 야유회 단체사진 속에서 볼 수 있는 주먹 불끈 화이팅! 포즈와 같달까?

입모양만 따라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목의 떨림이 없이 입만 벙긋대고들 있으니 말하는게 여간 귀찮지 않나 보다. 신입사원들은 아직 부담스러운지 씩씩하게 따라하진 않는다. 그러나 과/차장님들은 호기롭게도 외치신다. 그것이 지켜야 할 가정에 대한 의지 표명의 선언일지 아니면 그저 내지르는 외마디 비명일진 잘 모르겠지만.

 

1등. 듣기 좋은 단어다.

운동회에서 달리기 1등 도장을 팔목에 쿡 찍힐 때의 그 흥분, 시험에서 처음으로 1등을 했을 때의 감격, 하다못해 급식실에서 첫번째로 밥을 받을 때의 즐거움까지. 경험해본 사람들은 알 '1등'이란 건 어떠한 특권 의식까지 선사하는 일종의 트로피라고도 할 수 있다.

 

 

신입사원 그룹 연수를 마친 후 진행된 계열사 교육 입소식에서 처음으로 외쳐야했다. 반드시 1등을 하겠다고. 우리가 354기였으니 앞서 수많은 선배들이 우렁차게 소리치셨을거다. 어쨌거나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존속해 온 기업이다. 만리장성 마냥 오랜시간 쌓여온 그 역사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이어서 아직까지 1등을 부르짖는 또 하나의 불편한 역사에 숙연해진다. 

신입사원 공개채용 삼백 번째 깃수를 훌쩍 넘겨버릴 시간 동안 모두가 외쳤을 그 말,

 

'일등 합시다!'

 

 

 

 

침대에 누워 어린 날의 기억을 헤집다 문득 떠오른 말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보진 못했지만 어떤 영화의 제목이었기도 한 이 문장은 우리 세대에서도 이따금씩 등장했었다.

지당하게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좋은 성적은 더 큰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더라.

 

생각해보면 우리는 날 때부터 줄세워졌다.

1등으로 입성한 정자가 난자와 만나 태어났고, 선택이 아닌 성적 순으로 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취업 시장에선 더욱 잔혹하게 순서가 매겨진다. 다니는 학교나 회사의 네임밸류가 인생에 별을 달아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안도감과 자신감은 선물해준다.

어렵게 들어온 직장에서도 성적은 계속해서 매겨진다. 어느 팀이 실적이 좋은지, 누구네가 핵심 부서인지, 올해의 내 평가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대수롭지 않은 척 해도 자연스레 쓰이는 신경은 DNA에 깊이 새겨진 '순서'라는 키워드를 대변하나 보다.

비타민C도 좋고 D컵 가슴도 좋지만 C학점이나 D평가는 별로다. 인정하긴 슬프나 행복과 성적, 그 양의 상관관계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몸 담고 있는 곳은 특정 분야에서 국내 탑티어(Top-tier) 위치의 회사다. 이 쪽 분야에서 이름난 기업이 많지가 않아 줄 세우기도 민망하다만. 사실 몇몇 사업분야에선 국내 최고의 성적을 내고 있으나 각 사업부를 모두 뭉쳐 전체로 보면 2등을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그 앞에 강대한 경쟁사가 떡하니 버티고 있기 때문이렷다.

 

입사 전 외부에서 관찰할 때도 꽤나 있어보이던 그 격차는 내부에선 훨씬 잘 보였다.

'왜 거긴 만년 2등일까?' 싶던 질문에 대한 답은 사원증을 목에 걸자 그 베일을 벗었다. 하나씩 또 하나씩, 공포 영화의 전조마냥 자꾸만 드러나는 이유들에 둘러쌓이니 나도 모르게 한 숨이 폭-

아직은 사원 3년 차라 조심스럽지만 여러모로 개선이 시급해 보인다.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들은 진작에 기대를 버렸다. 어떤 건 정말 한 끝 차이인데 그 한 끝이 정말 매섭고도 무섭더라.

 

 

언젠가 유행한 좌우명인 '지키려는 1등보다 항상 노력하는 2등처럼 살자' 는 스스로의 의지를 강조하는 멋진 말이다. 그러나 2등의 현실은 인피니티 컨틀렛을 착용한 타노스를 제압하려는 어벤저스 마냥 각박하며 어쩔땐 애처롭기까지 하다. 과연 2등이 1등을 잡을 수 있을까? 국내에서도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2등이 1등의 위치를 뺏은 적이 몇 번 있었다만 일반적인 케이스로 볼 순 없을 것 같다. 굳이 따지자면 슈퍼스타 CEO 와 그의 조력자들 그리고 시대를 잘 만난 덕이 있었달까?

변치 않는 1등과 2등 사이엔 뭔가가 있음이 틀림없다.

 

군대에 있을 때도 우리 부대의 내 보직이 제일 빡셌던 것처럼 내가 다니는 회사가 가장 힘들고 짜증나는 곳이다. 만년 2등에다 마음에 안드는 것도 많고 노답인 부분도 한 가득이지만 밖에 나가면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더라. 외국만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 마냥 누군가 회사 욕을 하게 되면 "야, 그래도 여기 다닐만해~" (2등과 1등 사이엔 이런 자기 위안이 있었던 걸까..^^ 어쨌거나 텅 비어있기보단 뭔가로 채워져 있으니 다행이다.)

 

대학생 시절 미국 타임스퀘어에서 만난 우리 회사 전광판은 뉴욕의 밤거리를 빛내고 있었다. 그때의 나완 전혀 상관도 없었건만 왠지 모르게 꽤나 오래 응시했었다. 작년 가을 영국 런던의 피카딜리서커스에 위치한 전광판과 마주했을땐 맘 속으로나마 짧은 응원을 보냈다. 더 높은 곳에 우뚝 설 전광판을 위해, 그리고 1등이라는 단어에 조금은 덜 불편해질 나를 위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