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도 카페 하나 차리고 싶다."
예쁜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하노라면 슬그머니 튀어나오는 말. 실 없은 것처럼 들리지만 레알 트루 참 트루 진심의 말.
스타벅스가 국내에 첫 매장을 낸 해가 1999년, 지금으로부터 약 19년 전이다. 내 첫 커피는 2002년 월드컵 응원 중에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땀 흘리고 목이 마른 초딩은 그게 뭔 맛인지 생각할 틈도 없이 벌컥벌컥 마셨더랬다. 고등학생이 되는 2007년이 되서야 본격적으로 카페라는 곳에 드나들었다. 어색하기만했던 검은색 음료에 초록 세이렌 로고는 이제는 초등학생들도 아는 국민 키워드가 되었다.
요즘 편의점, 은행 ATM 이상으로 많은 것이 CAFE가 아닐까 싶다. 동네 카페다. 츄리닝 차림의 중딩들, 뽈 좀 차다 주스나 한 잔 하러 왔나보다 했더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른다. 한껏 줄여 입은 교복에다 앞머리에 헤어롤을 달고 손거울을 보는 여고생들 앞엔 라떼가 놓여있다. 그 옆엔 깔깔 대는 아주머니들. 바리스타라기엔 다소 엉성해 보이는 알바생도 나름 분주하게 뭔갈 하고 있다.
번화가로 발걸음을 옮긴다. OO카페 골목에는 흔히 말하는 인스타 감성 넘치는 인테리어의 공간이 그득그득 들어서 있다. 크고 작은 규모에 각각 지향하는 컨셉을 살리고자 공을 들인 흔적이 배어 있다.
도시 근교엔 또 다른 분위기의 카페들이 있다. 자연을 적극 활용하거나 큰 규모로 승부하는데 다들 고급진 느낌에 가격도 좀 더 비싼듯. 똑부러진 더치페이에 지출에 민감하던 친구들도 카페선 카드를 척척 내민다. 여기서 보내는 시간의 효용이 지불하는 돈의 가치보다 크기에 저리 흔쾌히 낼 수 있나 보다.
카페에선 사진을 많이들 찍는다. 찍히기를 잘 내켜하지 않는 나도 감성 뿜뿜인 카페에서는 못 이기는 척 최대한 자연스레 자세를 고쳐잡는다. 직장인이 되며 카페를 가는 빈도가 늘어났다. 커피가 몸에 잘 안 받는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푹신한 카페 의자에 앉아있자면 참 좋다. 위잉위잉 커피콩 갈리는 소리나 주변 수다 소리, 하다 못해 옆 테이블 진동벨이 울리는 소리까지도 경쾌하게만 들린다.
누가 싫어하랴, 답답한 사무실에 있다가 카페로 피난왔는데.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에서 은행원 봉수로 분한 설경구가 캠코더 앞에서 혼자 중얼거리던 것처럼, 직장인이라면 그것도 회사원이라면 내뱉게 되는 그 말.
나도 카페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사 동기들이나 내 주변만을 둘러봐도 알 수 있는 직장인들의 카페 사랑. 예쁜 카페 정보를 서로 공유하고 힙한 곳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곤 한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기꺼히 인스타 갬성충들이 되길 자처한다. 언젠가 동기 단톡방에서 회사생활 중의 소확행은 무어냐고,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누군가의 대답은 '외근 나가서 커피 마시기'.
소확행(小碻幸). 작을 소, 굳을 확, 다행 행 세 글자로 이뤄진 이 단어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일컫는 말로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에서 등장 및 정의된 바 있다.
강도 높은 스트레스에 노출되기 쉬운 직장인들은 언제나 그렇진 않지만 대부분이 지쳐있는 상태다. 마치 찰흙이 메말라 갈라지듯 얼굴엔 웃음기가 증발하고 고됨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퇴근 후에 친구들과 커피 한 잔하거나 주말에 연인과 한적한 교외 카페에서 보낸 시간이야말로 직장인들이 즐기는 낙일거다. 팍팍한 현실을 잠깐이나마 벗어난 뒤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쯤이면 입가에는 작게나마 미소가 피어있다. 갓 돋아난 어린 잎 마냥 보일 듯 말 듯한 그 작은 행복감의 유무가 얼마나 크리티컬할지는 다음 날이 되어보면 안다. 소소하나 소중한 우리의 시간이다.
느낌 있는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 것만큼이나 직장인들이 바라는 것이 있다. 내 카페를 가지고 싶다는, 설령 말 뿐일지언정 간절하게 들리는 그 바람. 회사를 다니는 우리들은 사업에 대한 동경과 함께 나만의 공간에 대한 갈망이 있다. 카페를 차린다는 건 둘을 모두 취할 수 있단 점에서 월급쟁이로 남의 공간에서 일하고 있는 이 세상 수많은 직딩들의 마음을 흔드는 아이템이 아닐 수 없다.
이십 대 후반엔 카페 하나를 차리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카페를 운영한다고 상상해보자면 그게 참 쉽지가 않아 보인다. 일단 점포를 내야 한다. 부동산을 알아보고 대출도 받아야겠지. 쬐깐한 카페지만 지금부턴 모든 것이 실전이다. 실전 기획에 실전 마케팅에 실전 영업에 실전 회계에 실전 인사까지. 요즘은 천지가 카페니, 정말 쉼터 삼을게 아니라면 나름 특색 있는 컨셉을 내세워야 한다. 알바생도 뽑고 월급도 줘야 한다. 월급날도 다른 의미로다가 기다려질거야.
요식업이니만큼 시그니처 메뉴도 개발해야 할 거다. 소파에 누워서 구경하던 백선생님 설탕 투척도, 냉장고를 부탁받는 어느 만화가의 중식도 퍼포먼스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인강 보듯 집중하겠지. 나이 스무 줄에 카페 한 번 차려봐야지 했건만 어느새 서른을 앞두고 있다.
외근 갈 때마다 텅 빈 카페가 있다. 한 두번 비어있었다면 몰랐을 그 곳은 언제나 한적하다. 궁금증에 들어가 음료를 마셔보니 유명 카페와 큰 차이를 못 느끼겠다. 인테리어도 힙하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 딱히 나쁘진 않다. 알바생의 친절도나 접근성도 평균은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손님이 없다. 왤까?
이 모든 게 다 이유였다. 회사생활만 해도 어중간하면 살아남기 힘든 판에 사업은 오죽하랴? 나만의 공간지기라는 빛과 자영업자의 고됨이란 그림자. 카페란 간판을 내건 곳들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로 너무 가까이 있다보니 그 현실을 간과해버릴 때가 잦다.
친구나 회사 동기들 중에서도 퇴사하고 카페나 차리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친구들이 있다. 절대 카페'나'가 되선 안 되겠다. 소확행의 기억으로 남던 카페를 간직하고 싶다면.
어찌됬건 나만의 카페를 가지고 싶다는 말은 들을수록 귀엽다. 특히 눈을 반짝이며 컨셉까지 이야기하는 친구들을 보면 덩달아 설렌다. 팍팍한 사회생활에 지치다 못해 나온 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 속엔 동심이 묻어난다. '카페를 차리고 싶어!' 장난스레 찡긋 대는 표정을 보면 종이접기로, 레고로 뭐든 만들어 내던 어린 날의 추억이 떠오른다.
존 쿠샥과 케이트 베킨세일 주연의 영화 <세렌디피티>. 주인공들은 뉴욕 센트럴파크 부근의 카페 '세렌디피티' 에서 우연히 만나 낯설지만 운명적인 인연을 시작한다.
우연하게도 찾아오는 행복의 느낌은 오래토록 남아있다. 신입사원 시절 지친 상태로 회사 앞 카페에서 마신 따뜻한 바닐라 라떼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별로 세련되지 않았던 동네 카페였지만 아늑한 분위기 속 따끈한 음료가 주는 온기는 위로가 돼주었다.
예쁜 카페가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느낌 있는 공간에 특별한 음료를 파는 카페가 늘어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곳에서 직장인들이 계속해서 그들만의 소확행을 꿈 꿀 수 있길. 길 걷다 만난 어느 곳에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뜻 밖의 행운(Serendipity) 일거니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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