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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38 오늘 쉽니다.

월요일은 만만찮은 날이다. 회사 창립기념일이었던 지난 금요일부터 시작된 3일 연휴 후에나 돌아온 월요일은 특히나 쉽지 않았다. 직장인들이라면 알거다. 아침에 눈을 뜨는데 얼굴을 찡그리지나 않으면 다행인, 툭 치기만해도 퇴사 욕구가 샘솟는 그런 아침.

 

주말과 평일이란 그 아슬아슬한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월요일 아침 출근해선 곧바로 카페로 들어간다. 흡연자들이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안정을 찾듯 텀블러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김이 얼굴에 닿으면 굳은 표정도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다.

 

 

월요일이면 회의가 길어진다. 회의실로 들어간지 2시간 후부터 얼굴들은 눈에 띄게 상기된다. 드디어 하이라이트인 주말 실적 문책의 시간이다. 최근 거래선에선 몇 건의 사건이 발생했다. 해결해보려 했으나 담당자 개인의 문제가 아닌 회사 차원의 문제라 수습이 힘들었다. 같은 일을 하는 그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그 누군가가 하필 나다.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최선은 다해볼 마음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될 때가지 뭘 했냐는 말에 맥이 탁 풀려버렸다.

 

쓰나미처럼 몰려온 빡침이 위태롭게 쌓여 있던 스트레스의 탑을 쳤다. 그게 무너져내림과 동시에 열이 뻗치곤 했는데 이상하게 더 차분해진 오늘은 평소완 조금 다른 것 같다. 뚝-하고 먼가가 끊어진 느낌. 안되겠다. 쉬어야겠다. 내일 연차 써야겠다.

 

 

 

 

 

좋은 구두는 착용자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는데 회사 쓰레빠는 그 주인을 두서 없는 곳으로 이끈다. 회의실을 나왔고 책상들을 지나친다. 정처없는 몇 십 걸음 후 사무공간과 복도를 이어주는 유리문을 나왔으나 더는 갈 곳이 없다. 이 이상 앞으로 나아가려면 아예 회사를 벗어나야 한다. 결국 화장실로 가 손이나 씻는다. 차가운 물이 손에 닿았다가 알알이 부서지는데, 튕겨나가는 이게 물방울인지 내 멘탈인지 헷갈린다. 다시 생각해봐도 내일은 꼭 쉬어줘야겠다.

 

퇴근이 1시간 조차 남지 않았지만 근태 시스템을 켜고 다음 날 연차휴가 신청을 했다. 팀장님만 결제하시면 되는데 퇴근시간이 3분 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아직 미결제 상태다. 못 보셨나보다. 망설임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팀장님, 저 내일 연차 좀 쓰고 싶습니다."

 

결국 쉬게 된 다음 날은 별 이유 없이 연차 휴가를 낸 첫 날이었다. 지방 생활을 하다보니 친구들을 보러 놀러 갈 때나 휴가를 내곤 했는데 이번만은 그냥 좀 쉬고 싶어서 내버렸다.

 

'오늘 연차입니다. 통화가 어려울 수 있으니 급한 건은 문자 남겨주시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연차휴가 때면 늘 카카오톡 알림말로 지정해두는 글귀다. 비록 아무도 보지도 않고 신경 쓰진 않는 듯 하지만 형식상 또 예의상 해두고 있다. 쉬는 날이라고 홍보 수준의 공지를 해둬바야 반드시 오고 마는 연락들. 결국엔 자기 필요한 이야기만 내뱉고 간다. “어, 딴 게 아니라~ 이거 좀 해줘요!!”

 

삼십에 하나 정도는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먼저 하긴 하나 그건 말 그대로 정말 삼십 명 중에 한 명 정도다. 팀장님은 쉬는 날에도 될 수 있으면 거래처에서 오는 업무 응대를 해주라셨고 의구심을 느끼는 와중에도 일단 지시를 따랐다.

 

 

점심을 먹으러 나가 유명하다는 매운탕 집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오늘 휴무일인가 보다. A4 용지에다가 반듯하게 쓰여 붙여진 '오늘 쉽니다' 이 자신감 있고 자존감 높은 다섯 글자에 낮은 탄성이 절로 나왔다.

 

핸드폰을 꺼내 아까 적어둔 알림말, '오늘 연차입니다. 통화가 어려울 수 있으니 급한 건은 문자 남겨주시면 연락 드리겠습니다.'를 몽땅 삭제했다. 부득이하게 쉬니까 양해를 구한다는 식의 구구절절한 문장은 지운다. 쉬는 날에 당당하게 연락와 용건 말하는 그들에 맞서 나 역시 자신있게 선언하고 싶었다. 그냥 나 오늘 쉬는 날이라고.

 

 

굳이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손해 보며) 일할 때가 종종 있다. 별로 복잡하지 않은 일도 깊이 고민하며 더 난해한 문제로 만들어버릴 때도 있고, 괜히 한번 더 생각하다가 타이밍을 놓쳐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냥 하면 되는 것도 눈치를 보느라 가슴이 턱턱 막히는 순간이 다분하다. 퇴근도 그렇고 연차휴가 사용도 그 중 하나겠지.

 

사회인 2년차, 한계까지 몰려보니 비로소 눈치보지 않고 하루 쉰다 선언할 수 있었다. 내일 쉬지 않으면 정말 큰일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쉬다 보면 어느 쪽으로든 마음이 정리되지 않을까 싶어 쉬기로 했다. 무슨 일주일을 쉰 것도 아니고 겨우 하루 쉰 건데도 참 거창하게 생각한다싶기도 했지만 사회초년생들에겐 하루 쉬는 것조차 눈치 보이는 일거다.

 

견뎌내다 지쳐서 하루 쉬었다. 나를 위해 하루 쉬었다. 쉬어보니 쉬기에도 부족한 하루였다. 무례한 사람들과의 통화는 오늘 쉽니다. 힘들게 하는 사람들과의 카톡도 쉽니다. 짜증나고 한 숨 나오는 생각도 오늘은 쉽니다. 내일보다 우선 오늘 쉴게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