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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40 고속도로 로망스

금요일 오후의 광주대구고속도로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예전 명칭은 88올림픽고속도로였다는데, 당시엔 차로 간 중앙분리대가 없었기에 죽음의 고속도로라고도 불렸단다.

 

경부고속도로에 비해 여긴 차가 정말 없는 편이다. 덕분에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달릴 수 있다. 소백산맥의 산악지대를 지나가는 길엔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된다. 동시에 산능선도 보였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마치 두더쥐 잡기 게임 같다. 오르막 길에선 엔진도 버겁단다. 엑셀을 지그시 밟아줄 때야 부웅- 하며 비로소 속력이 붙는다. 힘들다는데 빨리 좀 가라며 굳이 채찍질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오른발은 언제나 보채곤 한다.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도 있다. 가속도 실린 바퀴가 알아서 이끄는 순간이다. 여유롭고 상쾌하다. 영화 <제 8요일> 의 주인공 조지가 달리는 차 창문 밖으로 손을 뻗어 잡던 바람의 느낌이 이 비슷했을까?

혼자 운전할 때는 빈 자리가 어색해선지 음악을 틀어놓곤 하지만 몇 십 분 쯤 듣다 보면 되려 헛헛해지는 것 같아 꺼버린다. 그 무음의 상태가 고즈넉하면서도 희한하게 운치가 있다. 풀벌레 소리, 빗소리는 없지만 차 창의 미세한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소리. 고속 주행 상태에서만 들어볼 수 있는 낮은 위잉윙이 배경음으로 깔린다.

 

 

함양을 지났다. 어디서 들어봤다 싶었더니, 지역 근무 중인 동기들끼리 딱 중간 지점이라며 언제 한 번 모이쟀던 바로 그 장소다. 이정표에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른다는 화개장터도 있다. 다시 조금 더 달려 지리산 휴게소에 당도했다. 멀리서 보이는 산세가 참 험준하다. 나무도 빽빽하니 가까이서 보면 훨씬 더 깊은 산일거야. 휴게소 벤치에 걸터 앉아 할아버지 댁 아랫목에 누워 듣던 지리산 호랑이 이야기를 떠올린다.

 

광주에서 근무하는 회사 동기를 만나려면 이 고속도로를 통해야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 게 얼마만이었던가. 1평 채 되지 않는 곳에 콕 들여박혀 생각을 멈춘 적이 얼마만이었나. 꽤 오래 운전한 덕에 몸은 시나브로 피로해졌겠지만 이 시간이 참 좋다. 조금 뒤면 왁자지껄할테니 간만에 깃든 고요를 조금은 더 누려줘야지.

 

운전대는 가볍고 금요일 오후의 고속도로는 한산하다.

 

 

 

이번 포스팅의 원 제목은 <경부고속도로를 따라서> 였다. 운전경험이 많진 않지만 회사 업무로 인해 일주일에 꼭 한두번은 고속도로를 탔다. 지금은 담당 거래선이 조정되어 시내 주행만 하고 있다만 불과 수개월 전까지만 해도 시속 100km가 넘는 속도의 차 안에서 홀로 운전대를 잡고 있을 때가 허다했다.

 

외근길의 경부고속도로에서는 이런 저런 생각이 든다. 차들이 모두 쌩쌩 달리는, 위험천만한 그 속에 끼여있자면 긍정적인 생각보다 부정적인 생각이 더 빨리 찾아왔다. 거래처에 도착해서 대면 업무를 처리하고 다시 인근 카페로 들어가 랩탑을 두들기고 있을 때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쳐드는 힘 빠지는 감정들. 그래도 돌아오는 길에선 희망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퇴근, 따뜻한 집, 맛있는 저녁식사, 편안한 가족과 사랑스런 여자친구가 기다리니깐. 사람은 역시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경부고속도로는 어느 정도 친숙해졌으니 다른 도로도 타봐야겠다 싶었다. 일 때문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오른 광주대구고속도로.

이상하게 차를 몰고 멀리 떠나보고 싶던 날이었다. 몇 시간 동안만이라도 전화기를 뒤집어 둔 채 딱히 아무런 말도 않는 상태로 혼자서 시원하게 도로를 가르고 싶었다. 

 

고속도로는 목적지로 향하는 길목이다. 그렇기에 설렘이 피어나는 길머리다. 빠르디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좁은 박스 안에선 함께하는 이들과는 묘한 친밀감이 형성된다.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기에 심적으로도 조금은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랄까? 옆 자리에 누군가 있다면 서로 대화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이 곳은 고속도로 위 차 안. 덜 친하거나 그리 편하진 않은 사이일지라도 두어시간을 함께하다 보면 편해진 것 같은 착각마저도 든다. 로맨스, 혹은 브로맨스가 가득한 이 곳은 고속도로 위 차 안이다.

 

고속도로에선 추억도 시작된다. 어디로 가느냐 또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그 느낌도 확연히 달라진다.

 가족들과 해돋이 보러 가는 아빠 차 안

 대학 친구들과 떠나는 서핑 여행 차 안

 여자친구와 러브러브 트립행 내 차 안

 회사 동기들과 들썩대며 달리는 모임 차 안

 

 

얼마 전 동기들과 부산을 다녀오다가 운전대를 잡은 형에게 물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무슨 생각이 들어?"

"음.. 얼마나 남았나, 아님 언제 도착할까, 뭐 이런거?"

조수석에 앉은 친구에게도 물었다. 마찬가지란다. 생각해보니 나도 그렇긴 하다. 정면을 바라보고 운전하다가도 한 두번씩 눈은 네비게이션을 향한다.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 53km' '예상 소요 시간 35분'

 

어디까지 왔나, 얼마나 남았나.

비단 고속도로 위가 아니더라도 자주 하는 생각이다. '재는 행위' 라고나 할까? 월요일 출근해서 책상에 앉아서도, 퇴근하고 운동을 할 때도, 친구들과 술 마실 때도, 잠을 자려고 누운 그 순간까지도. 시간이 어느 정도나 흘렀나 싶다. 그러곤 남은 시간을 확인하며 현재를 기뻐하거나 슬퍼하고, 지나갈 순간을 아쉬워하거나 기다리며, 다가올 내일에 짜증나고 설렌다.

 

가끔은 돈키호테가 되어야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저 거인을 향해 용감하게 돌격해보기. 간 보고 눈치 보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그저 눈 앞에만 집중하기. 그렇게 내다르다가도 숨을 고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다. 어떻게 가야 잘 갔다고 소문이 날까, 어느 쪽으로 가야 주행시간을 줄일까, 하지 않아도 묵묵히 가는 길만 가도 이래나 저래나 비슷하게 도착한다.

 

광주대구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의식적으로라도 네비게이션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다. 대신 드넓게 펼쳐지는 산세에 탄성 한 번, 좋아하는 노래도 한 곡, 영화 성대모사도 몇 개하며 고속도로 여행을 즐겼다. 간간히 음악에 맞춰 스웩 넘치는 몸짓도 하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좋다.."

 

달리다보니 광주 톨게이트 앞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