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성공했다. 17시 30분 칼 퇴근.
28분에 PC를 껐고, 29분에 엘레베이터 속에, 그리고 정확히 30분이 되어 사옥을 나왔다. 빙글대며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거니 가볍게 떨려오는 엔진소리가 경쾌도 하다. 흐린 하늘에다 비 오고 쌀쌀하기까지 한 오늘 같은 날엔 꼭 칼퇴를 해줘야 한다. 운동도 쉬고 샤워 후 푹 쉴거야. 보들보들한 수면바지를 입고 발가락 꼼지락대며 여유 부릴거야. 음악을 켜고 그루브있게 엑셀을 밟는다.
직장인들은 가슴 속에 늘 사표를 품고 다닌단다. 그런 그들이 정말 바라는 것은 사실 퇴사도 아니요, 거창한 휴가도 아닌 오늘의 퇴근이다. 참 소소하다 우리, 그치? 그런데 이 퇴근이라는 놈이 꽤나 잡기 쉽지 않다. 퇴근시간이 다가온다 싶으면 사원들의 두 눈은 흡사 도망 노예를 잡으려는 추노꾼의 그것 마냥 시계를 흘겨본다. 이어서 옆자리 선배를 쳐다보고, 앞자리 과장님을 쳐다보고, 그 왼편의 차장님, 다시 그 맞은편 부장님을 본 뒤 마지막으로 저 멀리 팀장님 자리를 확인한다. 파티션 위로 검은 공 같은 것이 언뜻언뜻 움직이는 것을 보아하니 아직도 퇴근하려면 멀었다.
나의 2016년 평균 퇴근시간 시간은 오후 8시였다. 신입사원이라 딱히 할 일도 없어 애꿎은 엑셀만 켰다 껐다, 읽었던 교육 자료를 다시 폈다 접었다. 오후 7시가 되어도 오전 7시인 마냥 분주했다. 옆자리 선배는 아까부터 고개를 책상에 박고 있었는데 멍한 눈동자로 웹툰을 보고 있다. 일을 다해도 집엘 가지 못한다. 선배들이 안가고 있으니까. 계약서 상 퇴근시간이 지나도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팀장님이 아직 계시니까.
시곗바늘이 얼마나 돌았을까, 팀장님은 겉 옷을 입으셨고 모두들 슬그머니 책상을 정리한다. 엉거주춤 일어나는 폼이 막 직립보행을 시작한 인류의 조상 같다. 그들이 두 발을 딛고 더 많은 자유를 얻었듯, 우리도 두 발로 사무실을 걸어나오며 진짜 하루를 시작한다.
"고생하셨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돌아서는 얼굴은 볼터치를 한 듯 급격한 생기가 돈다.
안녕이란 말이 왜 이리도 하기 어려운지 모르겠다.
최근 우리 회사는 정부에서 시행하는 주 40시간 근무제를 발 빠르게 도입했다. 이름하야 더 아름다운 퇴근제! 18시 30분에 집에 가던 기존 아름다운 퇴근제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덕분에 하루에 총 8시간, 8시 30분부터 17시 30분까지 근무하게 되었다. 가라고 했는데 남아 있을 시엔 랜덤의 확률로 모니터링 되어 혼난다. 새로운 퇴근제에 대한 반응은 예상대로 극명하게 나눠졌다. 남아서 조금이라도 더하고 가려는 일개미파와 내일 일은 내일하자는 워라밸파. 전자는 보통 과장급부터 차/부장급까지, 후자는 신입부터 사원/대리급이 대다수다.
근무시간이 짧아진 것과는 반대로 봄이 되면서 해는 부쩍 길어졌다. 아직도 점심시간 마냥 밖은 환한데 퇴근을 하라니! 차장님, 부장님들은 어쩔 줄을 몰라하는 듯 보였다. 사옥을 나와서도 옹기종기 모여서 뭘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여전히 잡담 중이시다. 담배 연기를 후욱 내뱉으시며 시간이 너무 많으니 이젠 부업으로 대리운전 기사나 해야겠다며 낄낄들 대신다. 사원들도 옆에 서 있다. 입만 웃으면서 서 있는 그들이야말로 바로 살아있으나 죽은 상태요, 퇴근은 했으나 아직 퇴근 못한 상태다.
이대로는 모든 게 끝이야.. 누군가는 나서야 한다. 서로 간만 보고 있길래 그냥 내가 스타트를 끊는다. "어.. 고생 많으셨습니다~~ 잘 들어가세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우르르 흩어져가고 비로소 모두들 퇴근이란 걸 한다.
집에서 쉬고 있는데 후배에게 카톡이 왔다.
노루씨는 팀장님을 모시고 구미쪽에 업무 보러 갔었는데, 아직 퇴근을 못하고 있단다. 퇴근 시간은 이미 지났건만 업무는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고, 팀장님은 꿈쩍도 하지 않으시고.. 30분안에 얼른 마무리하고 구미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빨라봐야 저녁 7시 반일거다. 안타깝다. 짐작건데 저녁도 먹고 들어가자실거다. 애처롭다.
조심스레 말하지만 이건 문제가 있다. 대한민국 대기업들로 대표되는 우리의 업무 행태에는 공공연한 문제가 참 많다.
명목적인 퇴근시간은 17시 30분이다. 그런데 우리의 할 일은 곱절로 늘어난 기분이다. 업무는 최소 그대로에서 더 늘어났는데, 퇴근시간은 강제로 맞추라니. 업무량을 고려하자면 매일 야근 신청을 해야 할 판인데 그럴 수도 없다. 야근을 위해 초과근무를 신청하면 된다지만 다들 툴툴거릴 뿐 하지 않는다. 그리곤 집에 가서 남은 일을 한다. 침묵의 봄이 따로 없다.
어떻게 보면 전보단 나아진 듯 하긴 하다. 지금은 어쨌거나 17시 30분이면 나름 덜 눈치보며 사무실을 나올 수 있으니깐. 예전에는 야근도 못 찍고 눈치 한껏 보며 사무실에 어쩔 수 없이 남아 있었다. '일이 많으면 당연히 늦게까지라도 해야지!' 라는 식의 생각이 공기 마냥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랄까? 풍문을 듣자 하니 아름다운 퇴근제가 시행된 이후에도 대다수 조직책임자들의 생각은 그렇단다. 그들의 의견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남의 돈 받는 월급쟁이로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어느정도 회사를 다니다 보면 일을 낳는 것은 결국 일이란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일은 또 하나의 일을 낳는다. 다시 그 일이 다른 일을, 마지막으로 본 일이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낸다. 결국 그 논리대로라면 회사에 텐트치고 야영하듯 살면서 일해야 한다.
퇴근해봐도 되겠냐고 묻는 것도 내심 이상하다. 계약서에 적힌 퇴근시간은 나의 권리이자 회사와의 약속일진대. (야근시간을 포함해서 연봉을 준다는 포괄연봉제는 정말로 헛소리 중의 헛소리다.) 오늘의 내 업무를 다 쳐냈다면 당당히 집에 가자. 퇴근시간은 퇴근하라고 주어지는 시간이다. 상사에게 안녕이라는 인사를 공공연하게 구해야만 하나 싶다.
상사들에게 고(告)하나니, 누군가 나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한 번 쯤은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당신이 이따금씩 입에 다시는 '시대가 변했다'는 말. 핸드폰만, 패션만 바뀐게 아니라 직장생활에 대한 인식도 바꼈다. 후배들은 윗 세대가 그래왔듯 회사에 목매는 세대가 아니다. 그러니 그네들의 방식을 후배들에 강요하진 않기를. 퇴근 시간이 되면 '얘들아, 집에 가자~" 해주시면 좋겠으나 머쓱하다면 조용히 본인 먼저 퇴장해주시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답니다^^ 다행히 주변에서 그런 멋쟁이 선배들이 늘어나는 추세가 보인단다.
입이 없어 퇴근하겠다는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집이 없어 집에 가지 않는 게 아니라, 선배님의 눈치를 보느라 못 간다는 사실을 너는 과연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왕년의 월드스타 비의 초창기 노래 <안녕이란 말 대신> 의 가사처럼, 안녕이란 말 대신 작은 미소 하나만 주고 가면 될 듯 하다.
안녕이란 말 대신, 퇴근합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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