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전날 일곱살 꼬마는 잠을 뒤척인다.
평소엔 아침잠이 그리도 많았건만 연휴가 시작되는 빨간날 첫 날은 부모님보다도 먼저 눈이 떠졌다.
할아버지댁에는 아침부터 명절날의 용사들이 집결한다. 어머니, 큰어머니, 그리고 숙모.
어린 나도 엄마 손을 붙잡고 하품을 연신해대며 할아버지댁 대문을 밀어젖힌다. 혼자 냅다 뛰어들어가 사촌형과 놀기 시작하자면 어느새 어른들은 팔목을 걷어부치고 식재료를 꺼내고 계신다. 차례상 음식을 위해 달그락거리고 지글거리는 소리에 <냉장고를 부탁해> 못지 않은 부엌이 연출된다.
사방이 전을 부치는 고소한 냄새에 둘러싸인데다 과일이며 유과며 먹을 것 투성이였으니, 평소 식탐이 없던 나조차도 자꾸만 입안에 뭔가를 집어넣게 되는 그렇고 그런 분위기랄까?
할아버지댁은 총 3층 주택이었는데, 조부모님은 1층만 쓰셨기에 명절마다 나와 사촌형제들의 아지트는 2층이었다. 아이들은 뭐가 그리도 신이 났는지 온종일 위로 또 아래로 우당탕탕 뛰어다녔다.
마당의 석류나무는 소심한 돌팔매질의 대상이었고(열매가 떨어지면 혼이 났으므로) 꽤나 넓었던 옥상에선 얼음땡이나 술래잡기를 하며 오전시간을 보냈다. 이마에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히면 방안으로 들어와 부루마블과 비슷한 호텔왕 게임을 하곤 했었다. 심각하게도 부동산 사업을 진행하다 산적꼬치를 두어개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와 우엉이나 파 따위는 마당의 강아지에게 던져주고 햄과 맛살은 내 입 속으로 넣으며 킬킬대던 우리들의 명절은 소박하지만 풍족한 즐거움이 가득했다.
할아버지네는 지역의 종가(宗家)였다.
고로 우리 집안의 차례상이나 제사 분위기는 제법 컸었고 그만큼 볼만하긴 했다. (나이가 들어가며 이에 반감을 가지게 됐지만)
할아버지부터 아버지, 나까지 한복을 입었고 차례상은 큰 상 3개를 붙여 어머니 외 여럿이 이틀 내내 고생해 만드신 음식을 상다리 부러지게 얹는다. 음식을 차례상으로 옮겨가며 침을 꼴깍대고 있으면 어머니는 뒤에 빼놓은 고구마전이며 깎은 밤알을 입안에 쏙 넣어주시곤 했는데 엄청난 요리도 아닌 그게 그리도 맛났다.
상을 차리고 있자면 큰아버지가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이시(棗栗梨柹)와 같은 차례상 차림법을 알려주신다고 내가 아무렇게나 올린 음식을 재배열하며 교육하셨는데 그때마다 "왜 이걸 굳이 따라야 해요?" 란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명확히 듣진 못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제삿날이면 새벽 6시면 무조건 일어나 채비를 했다. 한복 매듭을 매느라 낑낑대고, 상차림을 돕고, 또 제조일이 언젠지 알 수도 없을 만큼 오래되어 곰팡내 나는 병풍을 펼친 후 제사용 돗자리를 깔고 향까지 준비한 8시쯤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한다.
차례에 참석키 위해 오시는 친척분들은 50~60명에 달했다.
설날이면 이 분들께 일일히 넙죽 세배드리며 얻던 용돈이 꽤 쏠쏠했기에 누군진 모르지만 오시는 어르신들이 반갑기까지 했다. 제사엔 보통 집안의 큰 어르신이나 맏아들만 참석했으니 오시는 분들의 가정마다 나머지 인원을 모두 더하면 아마 상당한 수가 할아버지네 종가에 포함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만큼 대규모 인원이 참석하는, 말 그대로 종갓집의 명절을 십수년간 보내곤 했다. 어릴적부터 봐오던 그것은 내겐 '당연한' 명절의 모습이었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였을까?
명절이면 발 디딜 곳 없던 할아버지 댁에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사람들이 발걸음이 줄어들기 시작했던 때가.
한 해, 두해가 흐르며 할아버지의 형제/사촌분들, 소위 말하는 집안의 어르신들이 더욱 어르신이 되어감에 따라 종가에 와서 제사를 지내기보단 각자 따로 차례상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던 것 같다. 매해 찾아오셔서 절을 나누며 하던 명절인사는 전화로 안부를 묻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기쁜 우리 젊은 날은 더하다.
꼬꼬마들이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고 또 직장인이 되어가매 명절에 아에 고향으로 집으로 가지 않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공부를 해야 한단다. 급하고도 중요한 업무가 내게만 주어져서 미안하다는 목소리가 전화 너머 들린다. 취업이나 고시와 같이 목표한 바를 아직 이루지 못해 귀성(歸省)도 '못한다는' 친구들도 은근히 보인다.
어릴적 온 가족이 모여 하하호호하던 명절은 내가 제일 기다리던 날이었거늘, 이제는 집엘 가지 않는 이들이 왜 이리도 많을까?
어지간히 알곤 있다만 굳이 말 꺼내기도 힘든 불편한 진실이다.
민족 최대의 명절 설날이 막 지나갔다.
이번 2018년 설 연휴는 주말에 걸쳤음에도 설날 당일이 금요일이었기에 대체휴일이 지정되지 않아 유난히 짧았다.
모두들 평소 입던 교복이며 정장을 벗어던지고 방구석에서 뒹굴거리며 웹툰을 보고 TV를 보는 연휴. 그렇게도 늦잠을 자고 싶었는데 이놈의 잠은 자도 또 자도 계속 찾아온다ㅎㅎ 기다린 만큼 명절연휴는 편안하고 노곤케하는 행복의 시간이다.
설연휴 하루 전날 여동생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귀성 KTX 예매가 쉽지 않다보니 진즉에 포기하고 고속버스를 타고 왔단다.
역시 집안엔 딸내미가 있어야 한다. 녀석이 그렇게 애교있거나 살가운 성격은 아니지만 엄마~ 아빠~ 거리며 재잘대는 소리가 방문 너머 들리면 이제야 사람 사는 집 같이 느껴져서 웃음이 나온다. 어릴땐 그렇게 지지고 볶고 싸웠었는데 이젠 이 아이가 가끔 귀여워 보이는 걸 보면 나이가 든 것이 괜히 실감난다.
내가 중학생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며 처음으로 우리 가족은 명절을 다함께 보내지 못했다.
그 뒤 대학교도 서울로, 직장도 서울에서 구해버린 나로 인해 명절에야 비로소 아버지, 어머니, 나, 동생 모두가 모일 수 있었다.
이후 동생도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었다만 동생은 북서울쪽, 나는 남서울쪽에 위치한 학교에 다녀 각각 자취를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은 계속 고향에. 한 가족, 세 가정.
온 가족이 뿔뿔히 흩어져버려 이산가족 아닌 이산가족의 형태로 지낸 지난 몇 년이었다. 그러다 2016년 말이 되며 내가 다시 대구집으로 돌아왔지만 아직도 동생은 홀로 서울살이를 하고 있고, 이번 설 연휴가 되어 4인용 식탁이 겨우 채워졌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종갓집의 소위 '빡센' 명절을 보내왔다.
사실 우리 어머니가 제일 힘드셨겠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나도 점점 이런 명절 행태에 지쳐갔다.
대학생이 되면서 머리가 제법 굵어졌는지 이젠 20년간 꼬박꼬박 자리하던 명절 제사자리에 더이상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주변의 친구들은 참 재미나게도 연휴를 보내더만, 왜 우리집만 쪼그려 앉아 차례상이나 차리고 있는지..
'명절이니 당연히 가는게 도리' 라시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억지로 할아버지댁으로 향하곤 했다.
그렇게 다람쥐 챗바퀴 돌듯 몇 년의 명절을 더 보냈고 작년 추석, 드디어 그 루틴한 일정에서 벗어났다.
처음으로 추석날 향냄새가 아닌 바다내음을 맡았고 절이 아닌 수영을 할 수 있었던 세부 여행.
차례상 차리다 손에 기름 묻는 일도 NO!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탕국에 제삿밥도 NO! 친척들끼리 겉치레 안부 묻기도 NO!
리조트 선배드에 누워 맥주 한 모금, 파도소리 한 모금 하다보니 여태껏 잊고 살던 명절연휴의 즐거움에 감격을 넘어 그간의 나날들에 대한 한스러움까지 느껴졌다. 그걸 보상 받기라도 하려는 듯 정말 최선을 다해서 놀고 쉬었다.
6박 7일간의 첫 명절휴가 후 다시 돌아온 대문 앞에서 뭔가 희한한 감정이 온 몸을 휘감았다.
나는 처음으로 오롯이 재미난 연휴를 보냈다. 차례를 지내지 않았고 친척들을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가족들은 그걸 그대로 했다. 아버지는 꼭 제사를 모시러 가셔야한다니 어머니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가신다. 동생도 안가면 꾸중을 들으니 입이 닷발은 나오면서도 차에 올라탔을거다.
어쨌거나 명절을 가족들과 함께 보내지 못했고 나는 결국 혼자만의 연휴를 즐긴거다.
비밀번호를 누르려는 손가락을 멈추고 제법 한참을 생각했다.
'내가 연휴를 잘 보낸게 맞나?'
명절 연휴엔 각종 영화가 특별 편성되곤 한다.
보지도 않던 신문을 연휴 전날이면 펼쳐들고 TV프로그램을 찾아보던 기억들이 날거다.
90년대엔 지금처럼 넷플릭스나 IPTV 등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기에 명절 영화 몇 편을 그리도 기다렸었다.
대개 첫 날은 세계를 뒤흔든 블록버스터부터 눈물 콧물 빼는 휴먼 드라마로 분위기를 이어가고 마지막으로 가족 영화로 방점을 찍어주며 연휴는 끝난다. 비슷하게 미국에서도 성탄절이나 추수감사절 기간엔 방송사마다 'Home for the Holiday' 라는 주제로 가족 영화를 앞세운 영화 시리즈를 내보낸다. 그것도 무려 1주일에서 2주 동안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미술시간엔 설날이나 추석을 어떻게 보낼건지 혹은 보냈는지 그린 적 있었다.
모두의 그림은 비슷했는데 윷놀이를 하거나 음식을 먹거나 다들 여럿이 모여서 뭔가를 하는 걸 그렸다.
그 표정도 일관성 있었으니, 웃고 있었다. 바로 이렇게 ^▽^
영화나 미술시간에서도 명절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웃으며 즐거워하는 날이다.
고정관념이 아니라 아름다운 우리의 기억이요 풍습이다.
'명절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당연하게 여기곤 있지만 어느순간 놓치고 있는 부분같다.
공부도 해야 하고, 일도 해야 하고, 약속도 있고,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놀고 싶기도 하다. 신기하게도 이건 모두 '나' 하나가 중심이 된 생각이다. 뭣이 그리 중헌지 모르겠다.
명절이라는 기간 동안 짧진 않은 연휴가 주어진다는 건 나름 의미가 있을거다. 나를 위한 위로의 날 하루, 리프레시의 날 하루, 그동안 돌아보지 못했던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감사표현의 날 하루, 고맙게도 주말이 추가로 꼈다면 너와 나 우리 화합의 날 또 하루.
멀리 있어 자주 뵙지 못한 부모님과. 보고 있지만 더 보고 싶은 그대와 함께.
"얘가 이번 연휴엔 안 내려오고 싶다네?"
저녁 식사시간 슬그머니 이야기를 꺼내시는 어머니. 별 말 없이 밥 한 술 뜨시는 아버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던 동생이 이번 설연휴엔 서울에 남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단다.
굳이 집에 내려올 필요도 못 느끼겠고, 또 왔다 갔다 번거롭기만 하니 내려오고 싶지 않단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대학생활과 직장생활을 하던 나도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는 간다.
그래도 옛말에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랬다.
나랏일 할 사람들이라면 응당 가족과 함께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는 것이 먼저란 생각이 든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나라와 세상을 평안케 할 수 있을거다. 나라를 잘 꾸려나가는데 일조할 자세를 갖췄는지 동생은 집으로 내려왔다.
내 동생이 그러했듯 바쁘고 힘들더라도, 아니 힘든만큼 가족 친구 또 연인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 평소 못 나눈 우정과 사랑을 나누라고 명절은 준비되어 있나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명절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해야 제 맛일거다.
집엘 가지 않는 너를 누군가는 기다린다.
행여 부르면 불편할까 못내 가슴이나 졸이시면서.
그러니 이리 외치는 것도 다 너 좋으라고 하는 걸꺼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명절에 살어리랏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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