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입사원김사자 』

[신입사원김사자] Ep.30 두루뭉술함의 미학

연초면 담당 상무님과 간담회를 가지곤 한다. 이때마다 상무님은 신입사원부터 팀장까지 전 구성원들의 새해 목표나 다짐 따위를 물으시는데, 보통 3일 전에 ‘개인별로 목표를 들어보겠다’는 통보 아닌 통보를 한다. 특별히 고민하진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만은 이를 전하는 팀장님의 목소리엔 은근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결전의 날인 2018년 1월 4일. 어김없이 목표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있었다.

"올해엔 지역 전체 영업왕이 되겠습니다!!"

"작년 큰 상을 받았습니다. 더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올해엔 더 좋은 기회를 창출해내고자 합니다."

 

다들 누가-언제-어디서-무엇을-어떻게-왜 시행할 것인지 구체적인 지표까지 앞세우며 본인들의 원대한 목표를 이야기했다. 이 아름다운 목표 배틀에 상무님의 입가엔 만족스런 미소가 번진다. 돌고돌아 어느새 내 차례다.

"작년엔 이제까지완 달리 성장이 너무 더뎠던 것 같아요. 준비운동도 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성장해보려구요. 제 거래처 실적도 나아질 수 있으면 그것도 또 좋겠죠."

 

 

상무님 표정이 알쏭달쏭하다 못해 아리까리하다. 부자연스럽게 움찔대는 입 주위 근육을 보니 뭔가를 말씀하시려다 참으신 듯 하다.

"응~ 좋은데, 너무 두루뭉술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짜보면 좋겠어."

 

내가 생각해도 확연히 모호한 목표 설정이다. 회사에선 개인적인 목표는 공유하고 싶지 않았고 또 그렇다고 지금하는 직무 내에서 특별히 더 해보고자 하는 일은 딱히 없었기에 대충 빨리 내뱉고 입 다물고 싶었다.

 

 

 

 

직장에서는 언제나 구체적인 것들을 선호하고 또 요구한다. 무한경쟁 사회의 회사원으로서 두루뭉술함은 사치요 죄악이란다. 구체적으로 정립하며 사는 게 좋을지 두루뭉술하게 생각하며 지내는게 나을지. 전기장판 위에서 귤이나 까먹으면서 시간때우기엔 나름 괜찮은 주제다. 두루뭉술 v.s 구체적

 

두루뭉술. 이름부터 귀엽고 호감가지 않나. 글자를 구성하는 철자들부터 몽글몽글한 느낌이니, 복실한 강아지 엉덩이를 쓰다듬는 느낌이다. 구체적. 그냥 읽으면 아니 된다. 구.체.적. 이라고 딱딱 끊어줘야 한다. 이런 뾰족뾰족한 자음들만 모아서 만들었는지 참 삭막한 단어다. (생각해 보자면서 벌써부터 한 쪽으로 치우치기)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하면 흔히 어린시절,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모르던 꼬꼬마 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더라. 문구점에서 산 포켓몬스터 골드버전 디스켓을 넣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던 8살의 나. 점심시간에 도시락 뚜껑을 열면서 침을 꼴깍 삼켰던 유치원생 시절의 너. 그리고 우리들의 피리 부는 사나이었던 모기 방역차(aka.방구차)까지.

 

지금 생각해보면 한없이 별 것 아닌 기억들인데 생생하다. 생각만 해도 웃음 지어지는, 소소한 즐거움이 가득했던 추억이다. 오늘 뭘 해야 하고 내일은 또 무얼 할지 일정을 짜지도 않았고 어떤 목표를 설정하지도 않았었다.

 

한 살씩 더 먹어감에 따라 점점 구체적인 계획과 목적 의식을 가져야 했고 그 여파로 정신 없어지고 지쳐 버리는 나날들이 늘어났다. 회사에 입사해 사회인이 된 지금은 구체인 뭔가를 해내지 않으면 열정 없는 놈, 능력 없는 놈이라는 평을 듣게 된다. 다음 달 예상 매출과 활동 계획을 정리하다 말고 문득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인 것들을 좇느라 두루뭉술함과 모호함, 불확실성의 미학은 잊고 사는 건 아닌지.

 

 

뭔가를 명확하게 계획하고 준비해 나가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모호했으며 끝없이 두루뭉술한 마음으로 살던 어린 날이야말로 행복을 가장 오롯이 만끽하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다시 한 달 전 상무님과의 간담회로 돌아가서, 구체적으로 내가 올해엔 무얼 통해 어떻게 성장하겠다고 답변했다면 참 좋았을 거다. 그만큼 의지도 다질 수 있고 상사들이 보기에도 생각 있는 놈으로 보여질 수 있을테니까. 그치만 혹시 업무적 계획이 뚜렷이 없다면 그 목표라는 놈을 굳이 지금 대충 정해서 말해야 하나 싶더라.

 

조직에서 인정받으려면 일하는 티를 팍팍 내주는 게 중요하고 그러려면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생활해야 하는 편이 좋다. 나는 그것보다 내면의 안정감과 현재의 나른한 행복을 느끼는 게 더 중요하니 덜 구체적으로 살아가련다. 모호해도 좋소, 두루뭉술하면 그걸로 또 좋소. 모호함과 두루뭉술함. 녀석들 속에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미(美)가 숨겨져 있었고 그걸 찾아낸 입가엔 전에 없던 미소가 지어졌다.

 

끝.

 

 

 

 

 

Comments

  • 동그리 2019.03.26 16: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나 써도 되나 모르겠네요
    초기에는 이걸 제가 잘안다고 '저요~ 저요!' 하면서 나섰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입을 다물고 소위 '두리뭉실' 로 행동하게 되더군요
    한자에 묵이식지 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직장인 22년차이니 저도 남이 시키는일 많이 하며 살았지요
    누가 '너 뭐하냐(뭐하고사냐?)' 라고 물을때 '난 사업해, 난 장사해, 난 직장다녀'라고 대답합니다.
    뭐하냐고 물을때 난 직장 대리로 다녀~, 난 부장으로 회사 다녀~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은 없지요
    사원이나 상위직급이나 남이 주는 월급받으면서 시키는 일 처리해야 하는 숙명은 똑같습니다.
    부디 열심히 일하셔서 원하시는 목표를 이루시기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