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치도 못하게 가장 고요했던 새해 첫 날의 시작이었다. 연말이라 친구들도 보고 회사 동기 모임도 참석할 겸 다녀온 서울 나들이의 밤은 길었다. 그래도 12월 31일은 집에서 보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새벽 첫 차를 잡아타고 내려왔건만 마음과는 별개로 비틀대는 몸은 그리도 피곤했었나 보다.
기절하듯 빠져든 단잠에서 깨어났다. 분명 뜨는 해를 보며 귀가했는데 창 밖을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다. 꿀잠도 자고 모처럼 모인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했으니 동네 친구들이나 만나러갈 차례다. 야심한 시간에 나서지만 정말 다른 의도는 없이 커피나 한 잔하며 지고 있는 한 해를 마무리 하고자 했다.
잠에서 깬지 몇 시간 되지 않아서 그런가, 눈꺼풀이 왜 이리 무거운지 모르겠다. 하품을 연신해대며 차에 오른다. 일요일 저녁 11시 40분. 평소 같으면 꽉 차 있을 지하 주차장 자리가 꽤 많이 비어있다. 다들 해돋이 나갔나.
해마다 그랬지만 연말 마지막 밤을 어떻게 보내야겠다는 계획을 세운 기억이 딱히 없었던 것 같다. 작년도 방에서 혼자 책이나 읽으며 다소곳하게 새로운 해를 맞이했던 것 같은데. 일출은 어제 기차에서 어렴풋이 본 듯하니 굳이 안 봐도 될 거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같은 태양일테니까.
2016년의 내가 집돌이로 마지막 날을 보냈다면 이번 2017년 12월 31일은 새해를 몇 분 앞두고 외출하게 되었다. 줄곧 잠을 청한 뒤 밥을 먹고 나니 정말 알뜰하게도 새해를 30분도 채 남겨놓지 않았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려면 아직 5분은 더 걸릴 듯한데 시계는 어느덧 23시 59분을 가리키고 있다. 2018년 1월 1일 0시 0분. 네비게이션에서 울리는 정각 안내에 들릴 듯 말 듯 나즈막히 읊조렸다.
"해피뉴이어."
스물아홉 살이 되는 해다. 매 년 먹는 나이니 무덤덤하다가도 올해는 20대로 보내는 마지막 한 해라니 퍼뜩 정신이 들었다. 스물아홉. 29. 9. 아홉. 아홉수.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아홉수다. 열아홉 때도 나름 아홉 수였겠지만 그때는 대학교 입시다 뭐다 정신도 없었고, 마냥 어렸기에 아무 염려도 생각도 없었다. 아홉수엔 몸을 사려야 한단다. 새로운 도전이나 시도는 가급적 피하라며, 걱정을 해주는 건지 겁을 주는 건지 다소 헷갈리는 말씀들을 하신다. 어느새 이런 미신까지도 골똘히 생각하는 걸 보면 나도 참 나이 들었다싶다.
연말이다 송년회다 너무도 시끄러웠다. 회사면 회사, 친구면 친구, 가족이면 가족, 각종 모임에 경조사에 정신을 놓다보면 나와 나 단 둘의 시간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감사하게도 새해 첫 날 새벽에 나는 나와의 오붓한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다.
홀로 생각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과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바라던 바를 끌어내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고민하고 사색하는 과정은 언제나 즐겁다.
20대는 다큐멘터리 보단 예능처럼 즐기자는 것이 내 젊은 날의 목표였다. 그리고 어느새 불쑥 찾아온 20대로서의 마지막 한 해. 언젠가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20대에서의 1년은 30대의 5년과 40대의 10년과 비슷할 정도의 가치라고. 20대의 1년, 2년을 어떻게 보냈는가에 따라 앞으로 다가올 30, 40대의 삶이 결정될 거라고.
아홉수 따위로 몸을 사리기에는 청춘이 아깝고 젊음이 아깝다. 10년에 걸친 마라톤의 결승선이 가까워올수록 설렘도 아쉬움도 커져간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구간인 만큼 지나간 아쉬움 보단 내일이 더 설렐 수 있도록 스퍼트를 올려야 하지 않을까?
스물아홉.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숫자다. 해피 뉴 이어, 해피 뉴 이어, 외치는 만큼 정말로 해피한 뉴 이어가 되어주길.
스물아홉 번째 혼잣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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