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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31 피터팬은 살아있다

조용히 빙글대며 맥주 마시던 그가 다음 장소를 제안했다. "우리 노래방 가자."

고기 구워서 밥도 먹었겠다. 다트 던지면서 맥주도 두어잔 했겠다.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놀아볼 타이밍이다. "콜!"

 

대구에서 함께 근무하는 동기 중에는 한 살 많은 형이 있다. 호리호리한 체형과 느긋해보이는 표정의 조합은 과묵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나무늘보 느낌을 물씬 풍긴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참 조용히 또 진지하게도 일을 한다. 내 뒷 자리에 앉아있건만 동기형의 말소리를 듣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목소리 대신 키보드 치는 소리로 온종일 자리를 가득 메우니 마우스 몇 번 클릭하다가 과자를 부시럭대며 낄낄대는 내 자리와는 제법 상반된다.

 

 

이 침묵의 브라더를 처음 만났던 날은 신입사원 연수 기간이었다. 수업시간에 과묵하면서도 날카로운 질문을 날리던 진지한 아우라에 접근키가 쉽지 않았다. 마지막 주가 되서야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있었다. 팀별로 자유 형식의 발표를 준비하는 기회에 형네 팀은 작은 연극을 꾸렸었고, 형은 평소의 차분한 모습이 기억 안날 정도로 미친 연기를 보여줬다. 누군가 외쳤다.

"이건 뭐 거의 지킬 앤 하이드 아니냐??ㅎㅎ”

 

발표를 마친 뒤엔 다시 차분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본모습을 들켜버렸다. 역시 보이는 것 만이 다가 아니다. 연기 하던 형의 얼굴엔 그간 보지 못했던 자유로움과 활기참이 한껏 흐드러졌다.

 

 

 

 

초등학교 3학년 때쯤 백화점 문화센터 뮤지컬 반에 들어갔었다. 3개월 동안 한 편의 공연을 준비해보는 수업으로 뮤지컬 제목은 바로 <피터팬>. 여러 노래 중 엔딩곡이 특히나 기억에 남는다.

 

"어린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지. 무럭무럭 자라서 어른이 되고 말지~♪ 어른이 되면 슬프고 괴로울뿐~ 돈을! 벌어야 하고! 자식! 키워야 하고! 재미도 없고 꿈도 사라져버려~♬ (빰빰 빰빰!) 어린이여 영원하라~ 우리 친구 피터팬~ 언제나 니가 좋아 참 좋아 우리의 친구 피터팬!"

 

그땐 몰랐는데 가사의 현실 반영 수준이 소름 돋늗다. 아직 자식은 없지만 돈을 벌어서 카드값을 메꿔야 하고, 하루 걸러 슬프고 괴로운 일이 꼭 생기곤 하는 어른의 일상기. 사회생활은 큰 재미도 없고 정말로 간직했던 꿈은 조금씩 갉아 먹히는 매일이 이어진다.

 

친구들이며 주변의 형, 동생들까지도 어느새 모두 이십대 후반이 되고 서른을 갓 넘기고 있다. 유치원 시절 서로 나서던 장기자랑은 이젠 대부분이 손사레 치는 것이 돼 버렸다. 남들 앞에서 꾸밈 없는 모습을 보이면 '또라이' '특이한 녀석' 소리를 듣는다. 먹지 않으면 먹히고 마는 약육강식 사회에서 본모습을 보이는 건 약점을 드러내는 것과 같이 거북한 일이다. 그치만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숨겨야 한다.

 

 

입사 후 지쳐버린 소년 소녀 웬디들은 어디선가 날아올 피터팬을 기다리고 있다. 꿈과 희망이 가득한 네버랜드로 데려가 줄 피터팬은 오질 않으니 계속해서 지쳐만 간다. 어디론가라도 떠나고 싶으니 퇴사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여긴 다르겠지 싶어 재취업을 하지만 이번에도 실망하고 또 다시 퇴사 버튼을 누르게 된다. 극단적인 선택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자아를 표출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회사 생활 중에서도 1순위로 지켜야할 건 변함없이 씩씩하고 활기찬 내 모습이니까.

 

신입사원 연수 때부터 1년 반 지난 현재, 동성로 ◯◯노래방 1번 룸. 사무실에선 콧노래조차 흥얼대지 않던 형이 방 안을 콘서트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바닥에 무릎까지 꿇으며 절규한 무대 매너에 분위기는 난리다 못해 숨 넘어갈 판이었다. 이 모습을 어찌 꽁꽁 감추고 살았을고. 사무실을 독서실화 시키던 그는 알고보니 이런 사람이었다. 눈동자에 다시 생기가 돌고 눈빛이 반짝이던 그때 생각이 들었다. 극과 극을 넘나드는 모습은 가히 <지킬앤하이드>의 한 장면 같지만 그래도 좀 더 동심 섞인 말로 대신하고 싶다. 피터팬은 살아있다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