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 초였던가, <23 아이덴티티(Split)> 라는 영화를 본 적 있다.
23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는 남자의 이야기였는데, 스토리와는 별개로 그 다중 인격의 소유자인 주인공을 연기한 제임스 맥어보이(James McAvoy) 의 연기는 몰입을 넘어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한 둘도 아닌 각기 다른 성격의 여러명을 자연스레 연기해 낼 수 있단 건 배우의 재능과 노력의 결과일거다.
TV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면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이 눈에 들어오곤 한다.
최민식, 하정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조니 뎁..
어떤 스타일의 연기가 좋다느니, 누구의 연기가 마음에 든다느니, 모두들 '명연기' 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이 있을거다.
그래도 보통 '연기를 잘한다' 라고 하면 연기가 자연스럽다못해 실제 모습인지 연기인지 구별이 어려울 정도를 말하는 것 같다.
그 배역에 잘 녹아들아가 연기하는 캐릭터 자체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고나 할까?
그런 배우들의 연기를 바라보며 몰입하는 과정에서 관객들은 웃고 운다.
그런데 혹시 그거 아시려나?
우리 주변에도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참 많다는 것을.
출근길 지옥철에 타기 위해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김대리님,
회사 앞 횡단보도에서 담뱃갑을 꺼내 쥔 손을 호호 불고 있는 박과장님,
아침부터 꽉 막힌 도로를 보며 애꿎은 운전대만 탁탁 치고 있는 신입사원 박호랑이까지.
겉보기엔 행인1, 동네 아재1 과 같은 단역 엑스트라 같아 보인다. 하지만 출근이라는 Scene #1 이 시작되면 눈빛부터 달라지는 이네들.
신입사원 김사자. 신입사원이요 직장인인 나도 예외는 아니다.
아침이 밝아오면 졸린 눈을 비비며 오늘 진행될 촬영을 위해 분주해진다.
밤새 자라 덥수룩한 수염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칼 주름 잡힌 수트에 매너있는 남자를 만든다는 브로그 없는 옥스포드화(Oxford without brogue) 까지 신어주면 의상은 완성.
어제자 실적에 대한 사유를 대사 외우듯 되뇌며 출근길에 나서다 보면 어느새 악역인 팀장님을 앞에 두고 열연을 펼치고 있다.
주위를 돌아보면 죄다 쟁쟁한 배우들이 자리하고 있다.
나보다 1년 먼저 이 판에 입성한 맞선배부터 노하우 충만한 10년 남짓한 중견 배우 과장님, 그리고 연기인지 일상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의 내공을 지닌 20년 경력의 원로 배우 부장님까지.
쉽진 않겠지만 이 기세로 몰아부치다보면 2017년 김사자영화제 남우주연상은 몰라도 신인남우상은 분명 내꺼다.
아무튼 여기 이 시대의 명배우들이 있다.
우리 팀의 대리님은 이따금씩 이런 말을 던지곤 한다.
"사자는 언제나 즐거워 보인단 말야~^^"
언젠가 회식자리에서 팀장님은 그랬었다.
"박코끼리! 최고릴라! 너희도 사자 보고 좀 배워라!! 쟤는 늘 웃고 있고 행복하잖아!!"
하지만 팀을 넘어 사옥 전체가 알고 있다.
어느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라는 걸.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나는 웃음이 생각보다 별로 없다.
아, 정확히 말하면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 앞에서 '굳이' 웃진 않는 스타일이다.
누군가 내게 "저 사람 앞에서 좋은 모습 보여봐~ 잘 보이면 너한테 도움이 될 거야~" 한다면,
무표정으로 "뭐하러 굳이. 필요 없어." 하고 내 갈 길 가는 성격이랄까.
그랬던 내가 신입사원으로 입사 후엔 자주 웃게 됬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먼저, 회사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기 위해서.
좋은 인상과 친절한 태도는 어딜가나 도움이 된다.
그 시작점이 바로 웃음짓기가 아닐까.
배우들이 연기전에 얼굴을 풀듯, 우리들도 준비운동으로 미소를 띄고 하루를 시작한다.
후배들에겐 친절한 선배로, 선배들에겐 싹싹한 후배로 보이기 위해 :-)
사실 나의 인상은 비교적 차갑고 무뚝뚝해 보이는 편이다. 워낙에 좋고 싫음이 명확한 성격이라 그런 까탈스러움이 얼굴에 그대로 보여진다.
그렇다보니 학창시절부터 은근히 적(敵)이 많았던 것 같은데, 회사에선 원래 하던 대로 하다간 소문에 사내 레퍼런스까지 귀찮아질 일이 많이 생기겠더라. 평이 좋진 않아도 나쁘게 나는 건 피하는 게 좋겠지.
그렇게 마음은 즐겁지 않지만 얼굴 표정만은 즐거워졌고 또 그렇게 나의 연기 인생이 시작되었다.
사실 그 진짜 이유는 스트레스를 덜 받기 위함이었다.
원체 스트레스에 취약한 편이긴 한데 막내의 회사 생활은 보람보단 짜증나고 스트레스 받는 것들이 훨씬 많았다,
잡일투성이에 자기 혼자 살아남기 바쁜 선배들, 그리고 대체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갈피도 잡히지 않는 업무까지.
안 그래도 힘듬으로 가득한데 호랑이 팀장님부터 늑대와 여우 같은 선배들 눈치까지 봐야 하니, 별거 없어 보이던 사회 생활이란 건 정말 고됨 그 자체였다.
여기서 일한지는 1년 반, 연차로는 어느새 3년차를 앞두고 있다만 웃을 일이 참 적다는 게 회사원의 삶이다.
주위를 휘휘 둘러봐도 딱히 나를 향해 웃어주는 이가 안보이는 곳이 바로 직장이다.
물론 일하다 보면 이런저런 헤프닝이 있기 마련이고, 그 중에선 희극도 있을 법하지만 일터라는 이름의 전쟁터에선 진심 담아 즐거이 웃을 일이 별로 없다.
행복의 표현 수단인 웃음이 줄어들면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진다.
불행까진 아니더라도 '행복하지 않다' 란 쪽으로 마음이 기울게 된다랄까.
이런 상황이니 내가 스스로라도 웃어야지.
열받는 상황에서도, 잡무에 치이다 지칠 때도 피식~ 썩소라도 한 번 지으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 기분 탓인진 몰라도 갑갑했던 숨통도 트이곤 한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90년대스러운 유행어처럼 억지로라도 웃는 습관을 평소에 길러두면 마음의 근력이 길러진다.
순간을 버텨내기 위해 큰 고민 없이 짓던 웃음이란 친구는 정말 힘든 시기에 내가 무너지지 않게 다잡아주는 든든한 아군으로 찾아올거다.
외적이고 내적인 요인을 챙기기 위해 웃다 보니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어느새 '즐거운 척하기' 는 내가 가장 잘하는 연기가 되었다.
경험한 바에 따르면 대다수 선배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더라.
후임을 잘 챙겨주고 있고 서로 친하다고.
물론 선배는 새로운 것들을 다수 알려주긴 하고 실제로 서로 공통 분모를 찾아 끈끈한 친분을 쌓아나가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거다.
그러나 그 후배 중 여럿은 선배에 대한 불만을 간직하고 있다. 선배들에게 밉보이면 입게 될 화(禍)가 두려워 하고 싶은 말을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만' 있다.
속 마음은 영화 <해바라기> 의 김래원처럼 "꼭 그렇게 다 시켜먹어야만.. 속이 후련했냐!!!!!!!" 외치고 싶지만 현실은 <말아톤> 의 초원이가 된 듯 그들을 향해 싱긋 웃고 말지.
신입사원 시절. 이들의 연기 인생은 아마 이때부터 시작되었을 거다.
막 팀에 배치된 신입들의 목표는 될성부른 신입 혹은 괜찮은 후배로 칭해지는 걸거다.
그런데 그리 되기 위해선 단순히 일 '만' 잘해선 아니된다. 일 '도' 잘하면서 깍듯하게 예의도 지키는, 신입다운 패기에 신입답지 않은 융통성까지 갖추어야 "그 놈 그거 쓸만해~" 라는 평을 듣지. 아, 그 와중에 센스는 필수다.
굳은 일을 마다 않고 기꺼이 웃으면서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걸 또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특히 좋아한다.
처음엔 어색해하지만 '~척' 몇 번 반복하다보면 원래 그래왔던 양 연기가 몸에 배게 된다.
술을 싫어하던 친구가 회식 자리에선 누구보다도 적극적이다.
웬만한 개그에는 꼼짝도 하지 않던 형이 부장님의 썰렁개그에 배를 잡고 쓰러진다.
담배냄새에 치를 떨던 동기도 '담배 피진 않는데 담배 냄새 맡는 건 좋아한다' 며 흡연자 선배 뒤를 쫓아간다.
사람에게 맞춰 주는 건 수학 문제 맞추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취업한 사람들이라면 어느새 이십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거고 어엿한 성인일거다. 어른이 되었으니 이젠 어른의 몫을 해야 한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맞춰나가는 건 그 시작이다.
그렇기에 1인 기업을 차릴 계획이 아니라면 그건 어쩔 수 없지만 꼭 거쳐야하는 통과 의례이자 사회생활의 영원한 숙제일거다.
하루에도 수 번은 "아니오!!" 라고 목 놓아 외치고 싶다만 입이 떨어지지도 않고 떼서도 안된다.
슬프지만 이런 비애(悲哀)를 현명하게 해결해나가는 일 또한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리라.
"이 남자가 내가 싫어하는 팀장이다, 이 여자가 나 일 몰아주는 선배다, 왜 말을 못해!!"
"이 직급을 하고 어떻게 그래요!!.."
언뜻만 봐도 대한민국 회사 생활은 군생활의 연속이다.
안타깝지만 직급이 깡패고 직책이 왕이다.
그를 싫어하지만 좋아하는 척 할 수 밖에 없고, 그걸 하기 싫지만 또 그것을 해야 하는 것이야 말로 직딩이란 이름의 배우들의 숙명이다.
팀원들 웃음 뒤의 그늘을 보지 못하는 팀장,
후배의 마지못한 아양을 친분으로 생각하는 선배,
그들은 인정하고 싶진 않겠지만 사실은 이렇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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