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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김사자 』

[신입사원김사자] Ep.24 안녕 런던보이

휴가를 맞아 런던에 왔다.

 

영국의 수도인 이 곳의 이름을 들으면 보통 빅벤, 런던아이 등을 떠올리곤 한다. 몇몇은 박지성이나 첼시처럼 런던에 없지만 영국엔 있는 것들을 생각하기도 하는 것 같다.

 

런던이라고 하면 내가 입던 니트가 기억난다.

2012년 군대 제대 후 복학했을 때였나? 대학교 2학년 시절 학교에 LONDON 이라고 쓰인 니트를 입고 갔다. 이것처럼 버건디 색으로 쓰여있었던. 

당시 죽 쑤고 있던 학점 회복을 위해 영문과 수업을 다수 듣고 있었는데 미국문학사 시간에 같은 조로 있던 한 명이 나를 보자마자 외쳤다.

"Hello, London boy!"

 

대학생들의 쾌활한 웃음 소리가 강의실에 울려퍼진다.

 

"아 뭐래~ 자리 앉게 나와나와."

"Okay, London boy~~!"

 

깔깔깔깔

 

"아 뭐라는거야. 조용히 해ㅋㅋ"

 

웃기면서도 뭐가 또 그랬는지 그 날 이후로 영문과 수업에선 그 런던 니트를 입지 않았다.

 

"런던보이~ 그 니트 요즘 안입고오네?"
"하 너희 땜에 갔다버렸다."
"아 그거 이뻤는데~~ㅋㅋㅋ"

 

가 본 적도 없으면서 가슴에 품고다니던 그 도시 런던.
5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 곳에 와 있다.

뉴욕 길거리엔 'I love New York' 티셔츠 입고 다니는 외국인들이 많던데 런던에 왔으면 내 빛바랜 런던 니트를 입고 촌스럽게 티도 한 번 내줘야 하는데 말야..ㅎㅎ

드디어 그 추억 속의 니트를 꺼내 입을 타이밍 같다. 그런데 옷장에 있는지 서랍에 있는지 대체 어딨는지 지금은 도통 알 수가 없네.
없어도 될 땐 있고, 있어야 할 땐 없고.
이것이 인생인 것인가!

 

여기는 런던, 영국이다.

 

 

 

 

내가 유일하게 이름을 기억하는 국제공항이 몇 개 있는데, 한국의 인천 공항, 뉴욕의 JFK 공항, 그리고 런던의 Heathrow 공항이다.

 

특히 이 Heathrow ('히드로' 라고 쓰겠다) 공항은 초등학생 시절 영화 <Love Actually> 에서 본 뒤로 왠지 모르게 뇌리에 박혀있다.

무려 10시간을 날아 히드로 공항에 도착한 나의 첫 느낌은! 응 그냥 공항이야.

 

인천공항처럼 깨끗하다거나 밝은 느낌은 덜했다. 역시 한국이 다른건 몰라도 교통 관련해서는 짱짱맨이다.

그래도 여행지의 첫 관문인만큼 공항은 곳곳에 설렘이 가득한 곳이고 나 또한 부푼 가슴을 겨우 부여잡고 있었다.

내가 유럽에 오다니, 런던에 오다니.

 

하늘을 보니 어지간히도 그레이(Grey)하다.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기 10분 전, 스튜어디스 아주머니에게 런던 날씨는 어떠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회색빛' 이라는 답변.
비가 올 정도는 아니지만 당장이라도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회색이다.

너무 좋았다.
내 머릿속의 런던은 비가 추적추적 오는 어두운 낭만 가득한 도시였는데, 상상만 하던 그 장면이 공항에서부터 날 마중 나온 셈이니. 시작부터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 갔다. 여기선 지하철을 말그대로 'Underground' 라고 하는데 물가 높은 영국의 명성에 걸맞게 승차권 또한 꽤 비싼 편이다. 런던 내에서도 Zone 이 나눠져 있어 가격도 다른 것 같은데 보통  Zone 1 에서는 한 역 이동 해보니 1.8파운드, 우리 돈으로 2,500원 남짓하는 것 같다. 지하철이 비교적 잘 되어 있어 여행 중 이동엔 큰 불편함이 없었다.

 

만일 누군가 런던의 도로에서 가장 인상 깊던게 뭐였냐고 묻는다면 단연 무단횡단!!! 이라고 대답하겠다.

신사의 나라 영국의 대표 도시인 런던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점은 무단횡단이 성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호등의 존재가 무색할 정도로 사람들은 길을 막 건넌다.
빨간불인데 정말 차분하게도 길을 건넌다.

킹스맨들의 이런 매너가 쌓여서 런던의 도로가 형성되었나 보다. 아니면 단체로 색약이 있나보다.
잘 한 건지 잘못한 건진 모르겠지만 이틀째부턴 로컬 피플들과 함께 자연스레 무단횡단을 행했다.
런던 패치 완료.

"무단횡단이. 런더너를. 만든다"

 

 

반듯반듯 새로 지은 건물로 가득한 한국의 거리와는 달리 런던의 그것은 비교적 옛스러움이 묻어난다.
한 눈에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을 수리해서들 쓰는 건지 커다란 아치가 곡선미를 자랑하는 건물엔 스타벅스가 있고 유니클로가 있다.

물론 런던의 강남 같은 Picadilly Circus 주변에는 명품샵이 그득하다보니 우리에게 익숙한 신식 건물들도 많긴 하다.
그래도 걔네들조차 성벽같은 외관으로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거닐 때마다 은근한 차(茶) 향이 난다면 기분 탓인걸까?

 

영국사람들의 차(Tea) 에 대한 사랑을 매일 보고 또 느끼고 있는 중이다.
구경을 하는 중 다리가 아파 들어간 스타벅스엔 영국인이라고는 점원들 뿐이었다. 커피란걸 마시러 들어온 고객들은 현지 거주 외국인이거나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카페 어디서든 아메리카노와 라떼를 파는 것처럼 영국에선 아무리 자그마한 카페에서라도 차를 판다.
영국에 오기 전부터 부쩍 차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있던차라 어디서든 차를 마실 수 있단 사실이 꽤나 반가웠다.

 

한국에서도 대중적인 만남을 카페에서 하곤 하는데 전국 번화가의 대다수가 엄마들로 점령 당해 있는 상태다.

낮부터 유모차를 끌고 들어서는 아주머니들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아기는 아기 대로 마음껏 뛰놀도록 두고 다른 엄마들과 신나게 웃으시며 만담을 즐기시는데, 이야기 내용 보다 웃음소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듯 하다.
반면 영국의 찻집인 Tea room 은 비교적 조용하다. 다들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웃기도 하는데, 희한하게도 별로 시끄럽다는 느낌이 들진 않는다. 친구끼리 또 가족끼리 모여 서로 차도 따라주고 조용한 즐거움을 공유하는 모습이 영국 특유의 아기자기한 홍차도구(Tea ware) 들과 더불어 참 보기 좋았다.

무단횡단은 하지만 역시 이들은 신사, 숙녀들의 아우리가 있다.

 

거리를 구성하는 하나 하나들을 감상하며 걷게 된다.

영국엔 멋쟁이가 은근 많다. 무심하게 걸친 조끼나 목도리 조차 '나 패피요~' 외치는 것 처럼 느낌있다. 삐딱하게 얹은 헌팅캡이나 셜록홈즈가 쓰던 디어스토커(Dearstalker) 모자를 푹 눌러 쓴 것도 참 멋지다. 내가 쓰면 저 태가 안 나올 텐데^^

어디에든 있는 빨간 공중전화 박스는 그 자체로 이미 거리의 포인트다. 우중충한 거리에 새빨간 박스 하나 있는게 생각보다 잘 어울리더라.  

 

높고 낮은 건물의 조화는 멀리서는 유화로 그린 풍경화 같고, 가까이 다가가 관찰하노라면 박물관에 전시된 옛 건물을 옮겨둔 것 같기도 하다. 한국과는 사뭇 다른 이 고풍스런 낯설음에 눈을 떼기가 힘들다.

외곽의 주거단지로 들어서자면 어릴 적 그림책에서 보던 집들이 쭉 늘어서 있다. 올망졸망한 주택가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노란 불빛과 굴뚝에서 나는 연기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한창 분위기에 취해 있다 보면 어느새 나는 직장인이며 휴가를 왔다는 사실 조차 잊게 된다.

달콤씁씁함이 슬쩍 스치운다.

 

 

아침, 해 질 녘, 그리고 저녁까지 시시각각 달라보이는 런던.

'영감과 판타지의 충족' 이라는 이번 여행 타이틀의 첫 장소로 손색이 없다.

 

한국만큼 번쩍이고 북적이진 않지만 갈무리된 세련미와 감성이 가득한 이 거리의 밤은 참 아름답다.

달빛이 타워브릿지에 걸려있는 운치있는 런던의 야경 속에서 런던보이의 하루도 저물어 간다.

 

안녕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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