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놓쳤다. 오전 8시 정각에 런던 킹스크로스역에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Edinburgh)로 출발하는 열차.
일찍 도착해서 해리포터가 카트를 밀며 돌진하던 9와 3/4번 플랫폼을 감상하겠다는 계획이 취소됬다. 영국에서의 아침답게 차도 한 잔하고 여유롭고 단정한 차림으로 열차를 기다리겠다는 낭만적 계획은 모두 취소. 대신 큼지막한 캐리어에 배낭까지 짊어지고 헐레벌떡 역으로 달려가는 모습으로 오늘의 여정이 시작됐다.
역무원에게 가서 사정을 설명하니 상당히 전투적인 자세로 듣는다. 인도계 영국인이었는데 귀찮아하는 눈빛. 역무원이 그 한 명뿐이었기에 차분히 말을 걸어본다. 대뜸 왜 못 탔냐고, 초행길이면 진작 더 일찍 나와야하지 않았냐고 혼을 낸다. 고객이 훈계 듣는 이 당황스런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잠시 갈피를 잃었다.
심히 불친절한 그의 태도에 기분이 상해, 이 사람과 이야기 그만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볼까 고민하다가 그냥 가만히 있어 보기로 했다. 이미 역무원에게 혼나는 봉변(?) 당하기도 해서 기운도 빠진데다가 흘러가는 상황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해서.
우여곡절 끝에 추가 금액 없이 다음 기차표로 교환 받았다! 낯선 역무원의 짜증을 한 바가지는 받아내야 했지만 막상 돈 굳으니 좋더라~ 신사의 나라라는 영국에서 이색 경험 하나 했다 생각하며 다음 열차에 올랐다.
북유럽 공기를 마신지 어느새 6일 째다. 빨간불인데도 우아하게 길을 건너는 영국의 신사 숙녀 대열에 이제는 자연스레 합류한다. 맞은 편 홍차집에 들어오며 비로소 런더너가 됐다고 낄낄대던 게 벌써 며칠 전 이야기다. 그렇게 잉글랜드를 거쳐 스코틀랜드로 향한다. 런던에서 산 포트넘앤메이슨홍차 세트를 들고, 디어스토커 모자를 쓴 채로 조금 더 미지의 지역에 가까워지고 있다.
기차안은 묘하게 조용하다. 정통 영국식으로 준비된 기내식도 먹고(기차라도 1등석으로 탔다!) 위스키도 한 잔했는데도 앞으로 두시간 반은 더 가야 한다. 앞에 앉은 동기형은 벌써 곯아떨어졌다. 딱히 잠이 오지 않아 창 밖을 계속 바라봤다.
여행 중엔 생각을 잠시 멈출 수 있다. 새로운 볼거리와 사람들 덕에 평소의 걱정거리는 잊혀진다. 처음 만난 세상의 정취가 어제의 고민은 구석으로 밀어낸다. 낯선 설렘에 잠자코 나를 맡기기만 한다면 얻을 수 있는 여행자만의 특권 아닌 특권이다.
홍차에 스콘도 한 입하며 차창 밖을 보니 참 좋다. 소들이 풀을 뜯는 모습도, 나무가 울창한 산림도, 해안가를 따라 올망졸망 모여 있는 색색의 집들도. 마치 여러 폭의 풍경화를 연이어 보는 것 같다.
눈 앞의 경치는 느린 듯 빠르게 바뀌어간다. 희한하다 싶지만 풍경 하나하나 모두 캐치하고 싶은 마음에 눈을 크게 뜬다. 집중해서 본다. 장면이 바뀌어가는 타이밍을 놓치면 창문엔 추상화가 그려진다. 영화 필름을 휙 당길 때처럼 주르륵 형체를 알 수 없게 변해가는 풍경들. 그때부턴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지는 순간이다. '멋지다', '아까 본 계곡이 대박이었는데' 감탄하며 평가하지 않아도 된다. 색과 형태가 뒤섞인 그것에 대해, 그저 창 밖 풍경이겠거니 나른하게 바라보고만 있어도 기분 좋다. 멍하니 있어도, 잠시 졸아도, 달콤한 몽상에 빠져도 된다. 그러다 다시 경치를 감상하고자 옆을 보면 거기엔 예쁜 산과 들과 나무가 여전히 있다.
걱정을 놓아 버리고 흘러가는 대로 둘 때 의외로 좋은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그간 너무 많은 고민과 함께 살아오진 않았나 싶다. 걱정해봐야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굳이 한 숨 폭폭 쉬어가며 맘 속에 두며 힘들어 한 적도 있다. 그냥 흘려 보내도 어떻게든 될 것을 꼭 붙들고 내 선에서 멋지게 해결하고 싶어하던그건 아마 욕심이었나보다. 삶을 살매 고민은 필요하다만 심해지면 고난이 온댔다. 사실적인 풍경화도 멋지지만 휙휙 놀리는 붓에 추상화가 그려지면 그건 그것대로 예쁠거다.
에든버러가 가까워져 온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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