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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20 나는 본사소로이다

발단은 이러했다.

 

지난주 간만에 교육을 받으러 평택러닝센터에 다녀왔다.

사원 2~3년차가 받는 직무심화 프로그램이었는데, 동기들이랑 함께 받는 교육인지라 며칠 전부터 설렜다.

공식적으로 팀장님 이하 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였기에 더욱 그랬겠지.

전날 인근에서 모여 하하호호 밤새 술잔을 기울이곤 밤을 꼴딱 샌 상태로 교육장으로 향했다.

 

꿈꾸듯 수업을 듣고 다시금 한 잔 하러 센터 내 편의점으로 집결한 우리들.

창원, 대구, 수원, 광주에서 제각각 다른 생활을 하다 모였으니 다들 할 말도 많다.

예전에 이야기한대로 우리들은 입사하자마자 회사 정책에 의해 전국 각지에 뿌려진 상태다. (Ep.3 너 정말 지방근무해도 괜찮겠어? 참고하면 그뤠잇!)

 

밤을 적시며 왁자지껄하던 와중, 한 명이 말을 던졌다.

"야 내 지점 니저가

'대리님~ 본사에 이야기 좀 잘해주세요~'

이러는 거 있지. 아니, 내가 본산데!!!!"

 

이름하야 '무등산 호랑이' J군.

호랑이 기운 가득한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한 뒤 현재 광주로 발령받아 포효 중인 친구다.

우리 중에서 가장 빨리 지역에 적응한 이 '서울산' 호랑이가 날린 썰은 오밤중에 제법 큰 웃음을 자아냈다.

녀석의 성격상 농담 90 정도일 이야기였겠으나 자리에 함께 한 동기들 역시 지역 근무 중이었으니, 다들 속으론 한번쯤 공감해봤으리라.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눕는다.

술기운도 올라 알딸딸하니 오만가지 잡스런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 와중에 머릿 속을 은근히 맴도는 그들의 대화.

 

"본사에다가 이야기 좀 잘해주세요~"

"아니, 내가 본산데!"

 

 

 

 

지방으로 발령받아 생활하다보면 알쏭달쏭할 때가 참 많다.

 

'본사에다가 한번 물어봐 주세요.'

'본사에 요청 좀 잘해주시면 안됄까요?'

'본사 분께 그렇게 전달 부탁드립니다.'

 

거래처 사람들은 이따금씩 이렇게 요청하곤 한다.

보아하니 그들은 나와 그 '본사에 계신 분들' 이 근무하는 지역만 다르지 사내서의 위치는 동일한 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아니, 그냥 내게 별 관심이 없는 걸까나?

 

대화를 하다보면 은연 중에 느껴지는 몇몇 분들의 인식: 지방 근무 직원 < 서울 근무 직원 라는 조직적 상하관계.

그래서 이 '본사' 라는 단어는 별 생각없이 들으면 그저 그렇거니 할 말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기분이 상할 이유일 수도 있다.

 

사실 사전적 의미로는 틀린 말은 아니다.

Daum 국어사전에 따르면 '본사(本社)'라는건 '본부가 있는 회사를 지사(支社)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또 여기에 나오는 '지사''본사에게 갈려나가 그 관리아래 일정한 지역의 일을 맡아서 처리하는 곳'.

 

자, 본사와 지사의 사전적 의미를 확인했으니 다시 위의 세 문장을 보자.

 

'본사에다가 한번 물어봐 주세요.'

'본사에 요청 좀 잘해주시면 안됄까요?'

'본사 분께 그렇게 전달 부탁드립니다.'

 

이번엔 또 당연한 말 같지 않나?

참 희한하지.

 

 

그래도 지역 근무자들에게 '본사에다가~', '본사 분에~' 하며 이야기 꺼내면 듣는 입장에선 기분이 그리 산뜻하진 않다.

왜 그럴까?

 

십수년 전만 해도 대기업 입사전형 중 지역출신(지역 거주자, 지역 대학교 졸업자) 대상으로 '지역인재전형' 과 같은 전형이 성행했다고 한다.

같은 지역 출신끼리 지역 포지션을 놓고 경쟁하게 되는 형태인데, 예를 들면 OO전자 춘천 사무실 근무 자리를 놓고 주변 소재 대학교 출신들끼리 경쟁하는 개념. 서울 소재 대졸자들은 같은 서울 내 학교 졸업자들끼리, 또 전주는 전주인들끼리.

우리 회사에서도 몇몇 계열사는 아직 지역전형 류를 시행하고 있는데, 그렇게 선발된 분들은 큰 이슈가 없는 한 첫 근무지에서 쭉 근무하시더라.

 

조심스럽게 이야기해보자면, 이와는 다르게 통합공채전형으로 입사 후 지역으로 배치된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가능성이 다분하다.

서울, 대구, 대전, 부산, 제주 출신을 넘어 미국이나 인도 출신들까지 같은 전형으로 공평하게 경쟁했는데.

같은 시험과 면접전형을 거쳐가며 함께 입사했더니 누구는 서울 근무고 누구는 지역 근무란다.

참 씁쓸하면서도 서운할거란건 빼박캔트다.

이런 감정이 큰 사람들의 경우 '본사' 란 말에 유난히 더 민감할 수 있다.

큰 갈래에서 보자면 지역 근무자던 서울 근무자던 모두 같은 소속이긴 하니깐 양쪽 다 본사 소속이란 말은 자명한 사실일진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 속 지역근무자들의 수난시대는 끝나지 않는다.

거래처선 뭔 일만 생기면 우리 말을 믿기보단 본사를 찾는다랄까? 아니, 저기요, 거기 연락해도 대답은 똑같거든요??..

심지어 우리 아버지께서도 종종 내가 뭘 잘 모른다 싶으면 "본사에 연락해서 물어봐라~" 하시곤 한다.

그런 멘트를 듣고 나면 쓸데없는 자존심인가싶기도 하면서도 왠지 모를 석연찮음이 느껴진다. 나도 본사 소속인데.

이 경우 "본사에다가 물어봐라" 가 아니라 정확하게는 "인사팀에 물어봐라" 혹은 "기획팀에 물어봐라" 라고 하셔야 한다ㅎㅎ

 

대구에서 서울까지 300km.

자가용으로는 4시간 남짓하고 KTX로도 2시간은 걸리는 꽤나 먼 거리. 

물리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와중에 이 '본사' 라는 단어는 심적으로도 그들과 동떨어진 느낌을 들게 한다.

 

사실 서울근무와 지역근무는 객관적으론 동일한 선에 놓여 있다.

서울에 있는 사원이나 광주에 있는 사원이나 월급은 똑같고 누릴 수 있는 사내 복지도 같고 여러가지 대우도 모두 같다.

그렇지만 대다수는 서울 근무자가 뭔가 더 높아보이고 좋아보인다는 느낌적인 느낌들을 가지고 있을 거다.

흔히 싱숭생숭해 하는 사람에게 '기분 탓일거야~' 라고 말해주는데, 이런 경우가 정말 기분 탓인 상황일 수 있다.

물론 직급과 직위가 높아질수록 핵심인재들의 다수가 서울에서 근무하긴 하더라. 그치만 막상 조직생활을 해보니 그 또한 절대적인 건 아닌 것 같다. 회사라는 곳과 인사이동이란 건 정말 알다가도 모를 것들이다.

 

결국엔 본사라는 말에 민감해하고 지역근무에 한숨이 나온다는 건 현실에 대한 자기만족도 차이가 아닐까?

만약 그런 상황에 놓여있다면 좀 더 자기 자신에 집중해보는건 어떨까 싶다.

어디서 근무하던간에 하루하루를 재미나게, 때론 진중한 고민도 하면서 열심히 산다면 '내 삶' 자체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거다.

"본사분께 잘 좀 이야기해주세요~" 하는 말은 그냥 씩 웃고 넘긴다.

따져 뭐해 어차피 내가 더 나은 놈인데 ㅎㅎ

 

지역이니 서울이니 그런 것에 마음 쓰진 말자.

어차피 모두 같은 신세 아니던가. 본사던 지사던 지역근무자던 서울근무자던 똑같은 계약서상의 '을(乙)' 들이다.

안타깝지만 현실을 받아들이되 회사에서 배울 수 있는 건 최대한 경험하고 뽑아먹을 수 있는 것들은 다 뽑으면서 멀리 보고 넓게 생각하자.

언젠가는 갑을 휘어잡을 수 있는 을들의 반격을 보여주자.

그렇게 되면 내가 본사니 지사니 하는 건 우주의 먼지만큼 대수롭지 않은 문제가 될터이니.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다' 란 말을 남겼다.

상당히 오만하다. 그랬기에 그 긴 시간동안 기억되어 온 걸까?

사실 왕은 없어도 국가는 유지된다. 반대로 국민들이 없으면 국가라는게 성립될 수가 없다.

비슷하게 구성원들이 있기에 조직은 유지될 수 있고 직원들이 존재함으로서 회사는 비로소 존속한다.

현실성 없는 농담이긴 하지만 전국 각지에서 우리들이 모두 나가버리면 기업들은 망할거다.

그러니 어디 우리라고 하나 못 남길까?

"내가 곧 회사요, 본사다."

 

나는 본사로소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