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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18 나 혼자 한다 (갠플인들 전성시대)

<나 혼자 산다> 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홀로 사는 스타들이 '혼자서도 잘 사는' 개인 삶을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인데, 2013년에 개그맨 노홍철, 가수 서인국, 기타리스트 김태원을 앞세워 시작된 이 방송이 어느덧 220화까지 진행되고 있단다.

그때만해도 큰 호응을 이끌어내진 못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많은 이들이 애청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프로그램의 주요 키워드는 '나 혼자'.

1인 가구 520만 시대인 요즘, '우리' 보단 '나' 에 대해 좀 더 익숙한 건 단순히 기분 탓만은 아니겠지?

내 삶, 내 것, 그리고 내 일.

 

그와중에 신조언지 외계언지 희한한 단어가 하나 생겼다. '갠플'. 풀어쓰면 개인플레이.

사회가 점점 더 다각화되 갈수록, 개인주의가 퍼져갈수록 이 갠플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간다.

나는 나, 너는 너, 구분짓는 것이 당연해진 지금은 바야흐로 갠플인들의 전성시대다.

 

 

 

회사란 곳에서는 갠플이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신입사원들은 꼭 소소한? 일들부터 시작하게 된다.

사옥 유지비용 처리라던지 법인카드 비용관리라던지 기타 잡다한, 말그대로 잡일들을 도맡아 해야 한다.

업무를 배운답시고 선배들의 일도 도와주면서 회사생활의 스타트를 끊는다.

얼마 뒤에 본인의 임무를 할당받게 되고 그때 비로소 '내 일' 도 생기게 된다.

선배 보조도 내 일, 팀 공통 업무도 내 일, 진짜 내 일도 또 내 일.

무슨 삼위 일체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서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왜 내 일만 할 수가 없지?'

 

내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팀 업무는 계속 늘어만 간다.

아무도 손을 안대니 내 일은 자꾸만 쌓여가고 애꿎은 펜만 부서질듯 꽉 쥐었다 놓는다.

 

고민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서 찾아오곤 한다.

욕 먹더라도 내 일만 해야 할지, 아님 선배 일이든 팀 일이든 발 벗고 나서는게 맞는 건지.

 

 

 

 

 

 

팀 분위기에 따라 업무형태는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자기 일만 딱딱 하는 팀 분위기 V.S 네 일, 내 일 가리지 않고 덤벼들어 처리하자는 분위기

서로 정반대의 스타일. 권투경기로 따지자면 거의 메이웨더 v.s 파퀴아오 급의 빅매치.

당연하겠지만 양 쪽 다 장단점이 있고 그 차이가 비교적 확연하다.

 

먼저 갠플 위주의 팀 문화는 일단 합리적이다.

내 일, 네 일이 명확하니 나는 그저 내 일을 할 뿐.

 

밥도 술도 혼자 할 수 있는데 일도 혼자 할 수 있지!

업무시간 중에 쓸데없는 대화나 친목도모는 원치도 않고 필요치도 않다. 아, 그래도 어느정도 웃어주고 팀 생활의 기본은 한다^^

중요한건 나는 내 일만 잘하면 된다는 점.

지금 커피를 먹고 싶으면 벌떡 일어나서 커피 한 잔 하고 와도 된다. 내가 맡은 일만 제 때, 잘 끝내면 되니까.

점심 식사 시간도 눈치보며 다 같이 맞출 필요 없다. 고민하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저 오늘 선약이 있어서..' 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팀의 최대 장점은 역시 합리적인이고 객관적인 분위기더라.

업무의 담당이 명확히 나눠진 만큼 비교적 자기 할 말도 할 수 있다랄까?

아닌 건 아니다, 맞는 건 맞다 라고 소신껏 또박또박 이야기 해도 크게 눈치보이진 않는다.

물론 한국 회사의 특성상 아랫 직급의 사람이 상사에게 100% 진심 담아 하고픈 말 하긴 어렵다. 그래도 적어도 갠플 팀에선 그런 걸 어느 정도까진 용인해주는 분위기다. 조직이란게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곳이다보니 그런 이들로 구성된 팀은 분위기도 함께 따라가는가 보다.

 

갠플 팀에서는 도움 받는 것도, 주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는 기류가 흐른다.

내가 도움받으면 언젠가는 나도 도와줘야하니까.

내가 도와주면 쟤가 갚으려고 들테니 그건 괜시리 더 신경쓰이니까.

자기 일은 자기가 챙기게 되니 팀원간 트러블이 발생할 건덕지조차 줄어들어 좋다는 견해도 주변에서 다수였다.

 

애초에 내 일은 내가 한다는게 굉장히 효율적인 업무구조다.

포드의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이 산업혁명 시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것처럼. 

자율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업무의 형태나 시간을 개인에 맞게 조율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선진적이다.

 

문제라고 굳이 산정하자면 갓 신입으로 입사한 뉴비들이나 직무가 다른 타 팀에서 이동해 온 이들의 경우 초반에 골머리를 앓을 수 있다는 점이랄까?

업무 매뉴얼을 익히다 궁금한 걸 물어보면 웃으면서도 "아 그건 제 일이 아니라서.. 저기 사자씨한테 물어보세요. 거기가 담당이니까." 하며 휙 돌아 앉아 다시 자기 할 일로 분주하니, 볼드모트 이름처럼 물어서는 안 될 걸 물어본 것 같다.

그렇기에 겨우 얻어낸 기회에 초 집중해야 한다. 처음 한 번 설명해줄 때 최대한 귀를 쫑긋 세우고 주의깊게 들어야 한다.

 

또 이미 할 일을 나누어 놓은 상황에서 팀에 새로운 업무가 도입되거나 추가 업무가 부여되면 누가 어떤 일을 할 것인지 눈치게임도 해야 한다.

누군가는 비교적 어려운 일을 맡아야 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구는 살짝 편한 일을 받을텐데, 이 경우 여태까지 유지해온 '합리적'인 평화로움이 깨질 수도 있다. 그래도 결국은 그 일의 경중(輕重)마저 잘 조율해서 다시금 명확하게 업무영역을 나눠가겠지, 그게 갠플인들의 강점이니까.

팀플하는 팀의 경우 우선 분위기가 화목한 편이다.

아버지까지는 아니지만 옆 집 아저씨 같은 팀장님에 동네 형 스러운 팀원들.

곧잘 장난도, 편하게 대화도 주고 받고 웃고 떠드는 소리가 옆 팀까지 들리는 활기찬 팀이 대다수다.

이런 팀의 최대 장점은 오순도순한 관계, 그리고 짜임새 있는 일처리와 선배들의 업무 지도랄까?

 

"일이다!" 하면 우르르 달려들어서 신속하게 할 일을 나눠서 빠르게 처리한다.

아직 미숙한 후배들이 끙끙대고 있으면 먼저 끝 마치고 조용히 다가가 조언을 해주는 든든한 선배들.

혹은 일이 제법 까다로워 선배가 짊어지게 되면 쪼르르 달라붙어서 보조를 해주는 똘망똘망한 후배들.

선배들의 풍부한 경험과 후배들의 패기가 시너지를 이뤄 어느새 완벽하게 업무를 마무리짓는다.

정(情)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선 나름 건설적이며 이상적인 회사생활이다.

 

문제는 내 일이고 네 일이고 가리지 않고 해야 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일 경우인데, 이때 강력한 퇴사욕구가 솟구친다.

실제로 내 옆 팀에서 2년차 사원이 이 비슷한 이유로 회사를 그만뒀다. 나보다 6개월 먼저 입사한 선배인데 잔뜩 괴롭힘만 당하다 조직에 대한 진절머리가 떨어져서 떠났다. 안타까웠다.

누군가 '사원은 사원급이 해야 하는 일이 있고, 차장이나 부장은 차부장급이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고 카더라.

맞는 말이다.

문제는 사원들은 저런 말을 굳이 하지 않으니, 꼰대들이 일 안하는 본인들을 합리화 하기 위한 말일 가능성이 크단 거다.

차장과 부장 선에서 맡아야 하는 일이 뭐가 있을까?

자잘한 일들은 사원, 대리급이 하는 거란다.

본인들은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큰 그림을 그리신다는데, 추상화를 그리시는지 눈썹을 그리시는지 잘 모르겠다.

 

 

한때 미국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한 형이 지난 여름 모처럼 한국에 들어왔었다.

세계 최대 IT기업에 몸 담고 있는 형인데, 함께 술 한 잔 하며 나누던 이야기 중 한 구절이 생각난다.

"미국에선 신입들이나 사원급은 꽤나 일이 적은 편이야. 직급이 높은 사람이수록 일이 많아지거든.

경력이 오래되고 직급이 올라갈수록 회사나 업무에 대한 책임을 지는게 당연하다는 문화야.

그러다보니 사원급들은 일에 대한 부담이 적고 퇴근도 빠르고. 한국으로 따지면 차장이나 부장급들이 업무도 많이하고 퇴근도 늦는 걸 본인들도 마땅하게 여기더라고. 한국은.. 정반대라며?"

 

직급이 쌓여갈수록 월급도 쌓인다. 쥐꼬리만큼 올라가지만 그래도 쌓여간다. 나보단 많이 받으실거다.

그러면 미쿸처럼 돈도 더 받고 더 높으신 분들이 일도 더 많이 하는게 당연한 것 아닐까?

그래 그것까진 한국에서 바라지도 않는다 ㅎㅎ

적어도 나눌 수 있는 일은 어느 한 사람이 짊어지지 말고 나눠서 했으면 좋겠다.

회사생활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다보니 내 수준에서 보지 못하는 부분도 있을테지만, 그래도 이 생각은 변치 않을 거다.

내가 위로 올라가면 더 더욱 변하지 말아야 할 신념일거다.

물론 열심히 하시는 차장님이나 부장님들도 계신다. 그런데 자기는 총 지휘 및 감독을 한다는 명목하에 밑의 애들에게 일을 떠넘기는 분들이 아직은 대한민국에 훨씬 많다. 

 

아는 동생은 윗사람들이 자기 일도 시키면 그냥 한다. X같지만 배울 기회라고 생각하고 군소리 없이 다 받아서 한단다.

그리고 일을 마무리하면 메일을 보내면서 일을 시킨 상사와 동시에 자기를 평가하는 상사나 팀장을 참조하여 보낸다고 한다. 

피할 수 없으면 적어도 생색이라도 내기, 또 티라도 내기.

그와중에 업무력은 상승하니 상당히 현명한 처사다.

이 친구는 홍콩에서 일하고 있는데 역시 어디든 가봐야 꼰대 보존의 법칙은 유효한듯하다.

 

팀플 중시의 폐해를 한 문장으로 말한다면,

"하다보면 결국 일하고 있는 건 너 혼자일뿐."

 

주변을 보고 있자면 결국 대다수의 선호는 갠플 중심주의로 회귀하는 듯 하다.

팀워크와 끈끈한 팀 관계를 앞세운 팀플 예찬론자들도 호되게 한 번 당하고 나면 부들부들하며 갠플 매니아로 돌아서더라. 

대학생 시절 팀플 무임승차자들에게 당하곤 할 때의 내 모습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누군가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게 오직 나만이라면 그것만큼 억울하고 짜증나는게 또 있을까?

 

일을 다 같이 하다 보면 누군가는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러나 갠플을 하면 적어도 손해는 덜 본다.

그러니 지금이 갠플인들의 전성시대인것이 당연지사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하는 게 나을지, 같이 하는 게 나을지 앞으로도 계속해서 망설여질거다.

 

머릿 속에 빙빙 맴돌다 입가서 멈추게 되는 이 말.

뱉을지 삼킬지 갈팡질팡하게 되는 이 한 마디.

 

나 혼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