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숭숭한 저녁이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사업파트너이자 친구의 얼굴을 보고 온 날.
웃는 중에 여러 이야기가 오고 또 갔다.
개중에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던 것들도 있었으니, 나름대로 정곡을 찌르고 또 마음을 흔드는 말들이었으리라.
집으로 향하는 길목과 내 마음은 유독 적막했고 위로하기라도 하려는 듯 고민들은 쉴새없이 다가왔다.
귀가 후 평소 마시는 차(茶) 한 잔 따라놓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를 읽으며 생각을 정돈하고자 했다.
큼지막한 잔 위로 벚꽃 흐드러지듯 퍼져가는 금빛. 쳐다만봐도 달콤따쓰해 이내 표정부터 차분해진다.
아직은 뜨겁다.
후- 불어가며 눈은 글자 위로, 생각은 그보다 좀 더 위로.
책에 따르면 인류는 계속해서 진화해왔다.
어쩌면 그건 현재까지도 활발한 진행형일지도 모른다. 일 년 전의 나와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나는 어떠한 형태로든 진보된 개체일 것이다. 아니, 되려 퇴화했으려나?
입술이 말라온다.
여전히 눈은 책에, 생각은 어디론가 띄워둔채 손을 움직여 책상 위 찻잔을 찾는다.
탁.
어?
찻물이 나일강 범람하듯 쏟아져내리니 책이며 상이며 방바닥까지 순식간에 흥건히 적셔간다.
보통 찻잔의 두어배는 됨직한 내 전용 잔은 차를 더 우려내기 위해 여러번 물을 부을 필요가 없는 아주 멋진 놈이었다만, 지금은 이 친구가 처음으로 원망스러운 순간이다.
그 속에서 잠시동안 시간이 멈췄다. 무엇 때문이었는진 아직도 잘은 모르겠다.
아마 앞전에 했던 고민 때문이었겠지.
몇 초가 흘렀을까.
뚝.
뚝.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왼 팔을 보니 팔뚝과 그 안쪽까지 벌겋게 달아올라있다. 우둘투둘하게 피부도 부어있다.
뒤숭숭했던 기분 탓일까. 은밀하게 아려왔던 마음 한 구석 때문이었을까.
화상 입은 부위가 아프다는 느낌보다 왠지 모를 쓴 웃음이 먼저 나온다.
뒤늦게 찬물로 씻어내고 화상연고를 바른다.
얼마나 흘렀을까?
시간이 지남에 붓기와 열기가 사그러들었다.
몸의 상처는 조금씩 나아가건만 여전히 기분은 뒤숭숭하고 가슴 한편은 쓰라리게 묵직하기만 하다.
꼬꼬마 초등학생 시절 <파랜드택틱스> 라는 PC게임 시리즈를 즐겨했었다.
내 기억으론 거기서 '엘릭서' 라는 포션이 최고의 회복용 아이템이었었는데, 이게 정말로 있는 영단어다.
Elixir.
영화 속 돌팔이 약 장수들이 노상 말하곤 하던 그 만병통치약이 바로 여기 있다.
만능약, 영약, 특효약이라는 뜻의 단어인데, 실제로 영어권에서 사용할 때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는 방안과 같이 비유적인 표현으로 사용하거나 신비의 묘약을 지칭할 때 쓴다.
급격하게 발전한 현대의학은 이 환상의 약 엘릭서를 비교적 흡사하게 재현해내고 있고, 오늘날 우리는 어지간한 상처쯤은 연고나 먹는 약 한 알로, 혹은 주사 한 방으로 금세 치유해내곤 한다.
상처에 연고를 바르면 처음엔 아프다가도 이내 시간이 흐를수록 나아간다.
희한하게도 몸의 상처를 낫게하는 약이 점점 더 개발될수록 사람들의 마음의 병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
할아버지 세대보다 부모님들의 정신건강은 나빠졌고, 그 자손들의 마음의 무게 또한 늘어만 가고 있다.
진학, 성적, 취업, 연애, 친구관계, 시사문제, 사회생활, 회사생활, 결혼, 재테크, 노후대비까지.
요 작은 몸으로 고민하고 신경써야 할 것들은 어찌나 그리 많은지.
하루하루의 상처도 얄궂지만 그 회복이 참 더디다는건 더 안쓰럽다. 그 와중에 옷의 실밥이 터져가는 것처럼 마음의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걸 알게 될 땐 정신이 아찔해지기까지 한다.
몸에 난 상처와는 다르게 가슴에 난 건 1년이 지나도 잘 낫진 않는다. 혼란스러워진 마음은 조금만 수면이 흔들려도 다시금 요동친다.
마음이 좋지 않을 때, 감정이 뒤숭숭할 때 바를 연고는 어디 없는지 모르겠다.
멘탈이 강하던 약하던, 어쨌거나 결국은 고민의 미로 속에서 길을 찾아낼 것이고, 고뇌의 심해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다시금 올라올거다.
혼자서 혹은 주변의 도움을 받아 그렇게 또 그렇게, 발걸음을 내딛는 우리의 과정.
그래도 가끔은 외면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연고처럼 내면에도 그런게 있으면 한다는건 혼자만의 바람만은 아닐거다.
이런저런 고민할거리도 걱정거리도 많은 우리네 삶.
지친 마음과 상처를 금새 낫게 해줄 연고 하나 생기기를 조용히 기대해본다.
삶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단건 행복한 일이다. 인생에 있어 직언해주는 친구가 옆에 있단건 인생의 기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이 벌린 마음의 상처에게가 연고하나 바르고 싶다는 생각은 욕심인걸까?
마음에도 바를 수 있는 약이 있으면 좋겠다.
누가 내게 연고 하나 발라줬음 참 좋겠다.
그 위에 밴드 하나도 붙여주면 정말 좋겠다.
상처에 겁먹지 않고 고민과 생각을 가슴 안쪽 좀 더 깊숙히 받아들이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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