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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19 출장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영업맨이다.

거래처를 예닐곱개 가지고 있지만 하나같이 가까운 것들은 없다. 가까우면 사무실에서 40, 멀면 고속도로를 타고도 1시간 반은 걸리는 곳들이다. 옆팀 동기의 거래처는 편도로 200km가 넘는단다.

 

대구 사옥에서 경주 거래처까지의 거리는 85.2km. 100km는 되야 멀다 싶겠지만 그래도 혼자 운전하기엔 심심하면서도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거리다.

 

 

외근과 출장은 영업의 상징이다. 팀장님은 매일매일 외근을 나가라고 닥달하신다. 책상이 아닌 현장에서 답을 찾으라신다. 문제는 영업관리 업무는 외근만큼 챙겨야하는 내근업무의 양도 만만치 않단거다. 발로 뛰어 일하는 건 분명 중요하지만 그걸 위해 책상에 앉아서 해야 하는 일도 있다.

그 와중에 마케팅과 스텝부서에서 던져주는 또다른 일거리로 정신없는 우리들에게 팀장님은 일갈(一喝) 하신다.

", 사무실에 있지만 말고 현장 나가라!!!!!"

 

싸울땐 먼저 치는 게 중요하듯 회사에서도 혼나지 않으려면 얼른 나서야 한다.

"팀장님, 저 출장 다녀오겠습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영업을 한다고 하면 은근 딱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영업해? 힘들겠다.."

영업, 이름부터 힘들어 보인다. 귀하디 귀하게 자라나 생판 모르는 이들에게 영업인가를 해야 하는 것도 거북하거니와, 딱히 모양새도 안나는 것 같고. 최근 우리 회사의 경우 문과생 신입사원들은 무조건 영업관리 직무로 시작하도록 정책을 개편했다. 짧게는 2, 길게는 3년 정도 현장 경험을 쌓고 그 뒤에나 타부서로 인사이동이 이루어지는 시스템이라 서른명 남짓한 동기들 모두 B2C 혹은 B2B 영업 최전방에 배치되어 있다.

 

본사에서 이름도 번듯한 팀 소속으로 일하는 것을 바래왔지만 막상 일해보니 제조업 기반의 회사의 경우엔 산업 전체의 이해도를 위해서라도 한번쯤은 영업을 겪어보면 좋을 것 같더라. "현장이지 말입니다!" 소리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영업이라고 하면 굽신거리거나 접대를 하는 모습을 연상하기 쉽다. ()과 을()의 관계. 심한 경우 병()이나 정()까지 내려간다. 영화나 드라마에선 좀 과장되서 거래처 사장에게 욕을 듣거나 납작 업드리는 모습이 보이곤 한다. 실제로 그런데가 있을련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인 곳은 아직 본 적은 없다. 물론 실적 때문에서라도 거래처와 좋은 관계를 형성해야 하고 그 과정이 유쾌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경부고속도로를 타기 위한 관문인 서대구 톨게이트는 늘 붐빈다. 각종 화물차에 버스들까지 1m 라도 앞서기 위한 경쟁의 도가니다. 퍼레이드 대열처럼 줄지은 차 중엔 나도 있다. 출장뷔페 직원도 아닌데 매번 출장 떠나는 나는 이 시대의 영업맨이다.

 

외근과 출장은 사무실 외부로 나간다는 큰 틀에서는 비슷하다. 차이라면 관할 구역 내에서 움직일 경우엔 외근으로, 밖으로 이동할 경우엔 출장으로 본다는 정도랄까? 예를 들어 서울 근무자일 경우 시내 이동일 경우 외근, 타도시로 이동할 경우 출장이라고 보면 된다.

 

 

출장 다녀오라는 소리는 솔직히 달갑진 않다.

늘 의자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들기는 사무직들이다보니 가끔 현장에 다녀오는 것도 정신적, 체력적으로 소모가 크다. 외근 나가라는 팀장님의 성화에 못 이겨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아 내가 이러려고 공부했나' 싶기도 하고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이 혼란스러움의 크기는 신입사원일수록 크고 적응하면서 차츰 줄어든다.

 

반가울 때도 있다. 출장이나 외근을 빌미로 답답한 사무실을 나오면 세상이 바뀐다.

따쓰한 햇볕과 맑은 공기, 하늘은 하얀 석면색이 아니라 흰 구름 섞인 파란색이었다. 거래처 다녀오는 김에 커피도 한 잔한다. 팀장 고함소리나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가 아닌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정식으로 허락받고 나온 공식적인 외출. 사무실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힐링타임이다. 비록 나가서도 랩탑을 펼쳐 업무를 처리해야 하고, 거래처를 들려 협의도 해야 하지만 적어도 혼자만의 시간이다. ()들이 곁에 없다는 건 큰 안심거리다. 일단 지금은 한 숨 돌릴 타이밍.

 

회사는 결코 직원들에게 베풀지 않는다. 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뽑아 먹으려 들지. 비행기에다 호텔밥까지 먹여가며 보내줄 땐 반짝이는 것들을 들고 와야 한다. 냉장고에 붙이는 따위가 아닌 번듯한 보고서나 블링한 아이디어 같은 것들.

출장과 외근은 좋지만 싫은 애증의 그것이다. 즐거운 순간도 있지만 짜증날 때도 많다. 여행 같은 출장, 나들이 같은 외근이 된다면 직장생활도 살 맛 날텐데.

 

오늘도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나는 달린다.

일을 위해 운전을 하는 건 썩 유쾌하지만은 않지만 최대한 여행처럼 즐겨보련다.

가을의 경주는 은근히 운치가 있다. 황리단길은 나처럼 분위기 있는 가을남자가 걷기에 딱이고, 고분들 사이를 걷노라면 기분이 묘하게 안정된다. 출장 싫다면서도 경주빵 하나 입에 물고 옛 가옥들을 구경하는 난 내심 이곳을 즐기고 있나 보다.

또 출장 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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