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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16 안녕이라고 말하지마

떨리는 너의 입술을 난 처음 보았지

무슨 말 하려고 말 하려고 뜸만 들이는지

 

2011년 발매된 여성그룹 다비치의 노래 <안녕이라고 말하지마>의 도입부. 시원시원한 가창력과 달달한 멜로디의 인기곡이었는데, 제목에서 감이 오듯이 누군가에게 안녕이라고 말하지 말아달라는 호소를 하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 여기서의 안녕은 연인관계에서의 이별을 통보하는 안녕일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가사를 곱씹어보면 쿨한척하면서도 안녕을 말해선 안되는 이유를 열심히 대면서 합리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의 모습이 연상된다. 슬프다. 3 40초 동안 오목조목 이야기하는 것 들으면 더.

 

 

이 노래에 나오는 '안녕'은 이별할 때의 그것이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또 다른 의미의 '안녕'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안녕하세요?" 할 때의 안녕.

"Hi!" 할 때의 안녕.

"Bonjour!" 할 때의 안녕.

"こんにちは!" 할 때의 안녕.

"!" 할 때의 안녕.

 

전 세계인들이 공통으로 하는 인삿말 바로 그 '안녕'을 차마 입 밖에 뱉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국엔 특히나 참 많다.

마주치면 "안녕(하세요)" 말하고 싶지만 말하지 못해 노래 속 화자(話者)와 같이 떨리는 입술도, 뭔 말을 하려고 뜸만 들이는 것도 비슷하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말을 아끼는 분들이 참 많다.

 

안녕이라고 말하지마라는 노랫말과 같이 마치 누군가에게 부탁받은 것처럼.

 

 

 

한국사람들은 대화시 상대(웃어른이라면 더욱)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걸로 예의를 보인다.

그렇게 형성된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대화를 하지 않더라도 옆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얼른 피하곤 한다. 먼저 본 사람도, 그 눈을 피한 사람도 어색함과 민망함에 엄한 바닥만 툭툭 치는 그런 적막을, 대한민국에 거주 중인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경험한 적 있을거다.

 

유치원생들은 인사를 참 잘한다.

아파트 엘레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사람에게마다 꾸벅 인사하곤 했었다. 그랫던 아이들이 옆집 아저씨 대신 거울이나 핸드폰을 쳐다보게 되는 시기가 온다. 머리가 굵어지고 세상을 알아가며 나와 너사이 경계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며 홀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어뭬리카에 도착한 내 눈을 가장 사로잡았던 광경은 금발의 미녀도 아니오, 수염미 뿜뿜 형님들도 아니오, 본토의 오리지날 빅맥도 아니었다. 눈이 마주치면 씩 웃으며 인사하던 그들의 모습이었다.

"Hi!"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웃으며 고개를 끄덕하고 지나가는 모습은 어릴 때 본 서부영화에서 악당을 물리치고 석양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보안관들처럼 너무 멋있었다. ‘인사를 잘하는 친절한 사람들그들에 대한 첫인상. 미국에 대해 호의적인 편인데 어쩌면 그 인상이 아직도 상당히 작용하고 있을거다.

 

눈을 통해 진심이 맞닿는건 아니겠지만, 따뜻한 눈빛이 오가면서 보다 나은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누구든 알고 있을거다. 마주치며 방긋 웃는 모습은 눈 앞의 상대를 사르르 무장해제시키곤 한다.

 

 

영미권에서 해외생활을 한 친구들은 아이컨택에 상당한 익숙할거다.

그네들은 처음 만난 사람들과도 어느새 활발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공통점은 눈웃음 지으며 먼저 인사를 건낸다는 점이다. 어색한 기류 속에서 먼저 인사를 해주며 그 긴장을 완화시켜주는 사람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 중 몇몇의 활동력과 친화력은 한국인들이 감내할 수 있는 기준의 이상 수준이라 나중엔 나댄다, 설친다, 갖가지 구설수에 올라 힘겨워 할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것만은 확실하다. 첫만남에서만큼은 그들이 대화의 중심이 되고, 모두가 기억하는 스타로 등극한다는 것을.

 

해외를 나가보면 유독 아시아권 사람들이 서로 인사 나누기 어려워하는 경향을 보인다. 특정 유적이나 관광지를 돌아보는 투어 프로그램에서 마주친 이들 사이엔 어색한 분위기가 맴돈다.

'아 인사할까 말까.'

'하 인사도 안했는데 엄청 오래 같이 있네..'

'지금이라도 인사할까? 아냐, 3시간이나 지났는데 지금 하면 더 어색할듯..'

내심 이런 마음들이 모르는 새 교차할거다. 일행이 화장실을 가는 등 어쩌다 무리에서 본인 홀로 남게되면 그 이상 또 어색할 수가 없다. 적어도 같은 공간에서 함께 뭔가를 하는 사람들끼리 인사 한마디씩 할 수 있다면 좀 더 편안한 분위기에서 재미나게 여행할 수 있지 않을까?

 

영국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는 저서 <인간오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백지론(Tabula rasa)'을 언급했다.

Tabula rasa는 라틴어로 '문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석판'이라고 해석되는데, 좀 더 풀어보자면 '아무것도 때묻지 않은 백지의 (정신)상태'라고도 볼 수 있다. , 로크는 인간은 타고날 때에는 그 정신이 순백색의 상태이지만 생활경험을 통하여 이 백지에 물이 들어가면서 관념을 형성해 나간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거다. 누군가와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눌 수 있다는 것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관념이 동작으로 형상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보통 민족성, 관습, 교육을 통해 그것이 이뤄지곤 한다. 백지에 빨간물이 들지 파란물이 들지 아니면 초록색이 배여들지에 따라 같은 것을 보고도 판단과 행동의 차이가 발생한다. 모든 나라의 문화는 그 자체로서 소중하다. 어느 한 색깔이 어떠하다라고 결론을 내릴 순 없기에 판단과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개인적으론 인사의 긍정적인 힘을 믿는다. 막상 해보면 생각 이상으로 즐거운 행위란 것까지도.

 

 

스쳐지나가는 거리에서는 어렵더라도 아파트, 회사, 학교처럼 결국 어떠한 형태로든 얼굴을 마주하게 될 사람이라면 1초라도 먼저 인사나누는 게 속 시원하다. '안녕'이라는 인사 한마디 뱉는 것만큼 관계에 있어 가성비 좋은게 또 있을까?

한번이 껄끄럽고 부끄럽고 민망하지 다음은 비교적 낫고, 세번째는 편안하고, 네번째면 익숙해진다.

 

그래도 은근히 꺼려지는 수 있을거다.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하기가 좀 그래요.'

맞아. 굳이 불편한 마음을 가지면서까지 인사할 필요는 없다. 아는 형님들을 만들기 위해 인사하자는 건 아니다.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인사하잔건 더 더욱 아니다. 내 삶을 챙기며 사는 것 만으로도 얼마나 힘든데.

 

다만, 인사에 익숙해지고 처음 보는 이들에게도 편안히 눈웃음 지을 수 있는 여유와 넉살이 생길수록, 마음의 그릇은 커져갈 것이고 얼굴의 미소는 한층 빛날 것이란 사실. 그거 하난 확실하다.

 

내가 그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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