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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아트투어 김사자] 행복.4 가을날의 첼로를 좋아하세요? (feat. 미샤 마이스키)

왜 그런거 있잖아,

아무 이유 없이 괜히 멋있어 보이는 거. 

내겐 그런 것 중 하나가 바로 첼로 연주자였다.

 

꼬꼬마 초딩시절부터 첼로 연주자들은 괜시리 멋져보였었지.

당시 내 몸만한 커다란 첼로를 턱하니 쥐고 멋들어지게 활을 그으면 울려퍼지는 웅장한 소리.

바이올린 연주에 경쾌하고 산뜻한 느낌을 받았다면 첼로 연주를 통해서는 묵직하고 깊은 울림을 느꼈다고나 할까?

 

1994년에 개봉한 <가을의 전설> 이라는 영화가 있다.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였는데 꽤나 장발의 머리를 휘날리며 말을 달리고 자유분방하게 스크린을 누비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곤 한다.

2013년 가을에 이 영화를 봤는데 영화 내용은 잘 생각나진 않지만 톰 크루즈의 이미지가 내겐 가을의 전설 그 자체로 남아있다.

그리고 2017년의 가을, 또 하나의 장발 영웅이 성큼성큼 전설로 다가왔다.

 

첼로 리사이틀은 이번이 처음이다. 운 좋게도 그 첫 시작부터가 너무나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바로 첼로의 음유시인이라 불리는 미샤 마이스키(Mischa Maisky)의 2017년 내한공연.

 

요요마(Yo-Yo Ma)와 함께 세계적인 첼로의 거장으로 불리는 미샤 마이스키는 첼로! 하면 떠오르는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를 사사한 점과 동시에 한국에서는 첼리스트 장한나를 세계무대에 진출시킨 선생님으로 유명하다.

그런 분의 연주를 들을 수 있기에 정말 행복했다.

그것도 맨 앞자리에서 말이다.

 

▲ 대구콘서트하우스가 기획한 2017년 명연주시리즈 중 해외 연주자로선 마지막을 장식하는 미샤 마이스키의 무대. 첫 첼로공연이라는 점에서도 내겐 꽤나 기억에 남을 공연이다.

 

올해로 70세이신 미샤 마이스키는 딱 보자마자 천상 음악가의 이미지였다.

우뚝 솟은 콧대와 초딩시절 미술학원서 그리던 아그리파(Agrippa)처럼 움푹 들어간 눈매, 백발의 왕곱슬머리는 부드럽지만 강단있는 첼리스트의 모습을 여간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다.

 

 

1948년생의 미샤 마이스키 아저씨와 90년생의 나는 42살이나 차이가 난다.

42년은 강산이 4번이 바뀌고도 5번째의 준비를 하는 세월.

멀고도 먼 우리의 나이차가 현(絃)의 향연 속에서 마법처럼 매워졌다면 이해가 될까?

(내 머릿속엔 미샤 아재, 첼로, 마법, 성공적.)

 

아는 사람만 아는 해리포터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입학일은 9월이다.

마법은 가을에 시작되고 오늘의 요술지팡이는 바로 첼로다.

 

첼로와 함께 시작되는 가을 전설의 마법 나와라 얍!

 

 

 

 

미샤 마이스키의 2017년 내한 리사이틀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두가 아는 슈만(R.Schumann)과 브람스(J.Brahms)의 곡들로 1부를,

일반인들에겐 조금 생소한 풀랑크(F.Poulenc)와 브리튼(B.Britten)의 곡으로 또 2부를.

 

보통 슈만과 브람스의 곡들은 같이 엮여서 연주되는 경우가 많은데, 슈만과 브람스 그리고 클라라의 이야기를 다룬 첫번째 글 [아트투어 김사자] 행복.1 사랑에 빠져버린 날 을 참고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슈만의 환상소곡집은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제목일거다.

오늘 연주된 곡은 환상소곡집 Op.73(Fantasiestucke, Op.73)으로

원 제목은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소곡집 Op.73'인데, 클라리넷 대신 첼로나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기도 한다.

총 3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은 빠르게(Allegro)/느리게(Adagio) 표시를 아에 빼버리고 샹냥하게, 생동감 있게 등 연주시 필요한 감정표현으로 악장별 표기가 되어 있단 점이 작은 특징이다.

 

1악장은 Zart und mit Ausdruck (상냥하게 그리고 표정을 가지고)

2악장은 Lebhaft, leicht (생동감 있고 가볍게)

3악장은 Rasch and mit Feuer (빠르고 불처럼 열정적으로)

 

개인적으로 1악장이 첼로라는 악기와 참 잘 맞는다고 느꼈는데, 시작부터 묵직한 울림에서 가을밤 우수에 찬 내 모습이 상상되곤 했다ㅎㅎ

1악장의 표기와 같이 말 그대로 감정이 꽉 찬, 무언가가 전달되는 것을 보니 한층 곡과 가까워진 기분이 든다. 

악장별로 느낌이 정말 확연히 다르다. 각자 취향이 있을테니 어떤게 내게 떨림을 주는지 한 번 들어보자.

 

https://youtu.be/lIbEk48Ga30 (출처 Youtube)

1982년 62세의 미샤 마이스키가 뮌헨에서 연주한 슈만의 환상소곡집 Op.73. 이때의 그는 그림 그리기 겁나 어려운데 혼자서 "차암~ 쉽져^^??" 하던 화가 밥 아저씨와 닮아보인다. 

 

두번째 곡은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 제 2번 F장조, Op.99(Cello Sonata No.2 in F major, Op.99).

브람스는 2개의 첼로 소나타만을 남겼다고 한다. 첼로 소나타 1번을 작곡한지 20년 만에 내놓은 이 곡은 총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50세의 브람스의 무르익은 음악성을 녹여낸 곡 특유의 느낌과 첼로의 묵직한 신중감이 조화를 이루어 더욱 가을밤에 걸맞던 선율이었다고나 할까?

특히 이미 들어본 적있던 2악장(Adagio affettuoso)을 미샤 마이스키의 연주로 들을 수 있었다는 건 또 하나의 감동이었다. affettuoso는 '감정을 담아' 라는 뜻인데, 그래서인지 좀 더 서정적인 분위기로 둘러싸여 있기에 듣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몰입케 한다. 현을 손가락으로 튕기는 주법이 곡에 어찌나 잘 어우러졌는지 듣는 내내 곡의 마력에 흠뻑 취해있었던 나.

 

https://youtu.be/0TH5kiyMo4A (출처 Youtube)

▲ 첼리스트 양성원이 연주한 브람스 첼로 소나타 제 2번 F장조, Op.99 2악장. 요즘 같은 청량한 가을밤에 들으면 정말 살아있다.



20분의 인터미션 후 이어진 2부의 시작은 풀랑크의 가곡 5작품이었다.

가곡이라면 슈베르트가 제일 먼저 떠오르곤 하던 내게 풀랑크의 곡은 쉬우면서 동시에 어려운 새로운 느낌을 전해주었다.

프랑스의 가곡인 멜로디(melodie)를 평생 썼다는 그의 곡은 왠지 모를 가벼움 속의 묵직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곡의 구성이나 음계가 비교적 변화무쌍하지 않아 편안하게 들을 수 있지만 사이사이 터져나오는 진지함은 노스텔지아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예전부터 한국사람들의 정서와 가곡은 궁합이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풀랑크의 멜로디들도 남녀노소 누구든 즐길 수 있는 곡들이니 꼭 들어보면 좋겠다. 

 

그 중 기억에 남던 곡이 2곡인데,

<가상 약혼식> 중 5번 '바이올린' (Fiancailles pour ire: 5. Violon)과

사랑의 길 (Les Chmins de l'amour).

아래에 연주 링크 바로 이어지구요~

 

https://youtu.be/XZInjdfkgqc (출처 Youtube)

▲ 미샤 마이스키가 연주한 <가상약혼식> 중 5번 '바이올린'

   2분 30초 남짓의 짧은 곡이다. 연주시간을 모르고 들으면 어???? 뭐??? 끝났어??? 할 수 있는 곡.

 

https://youtu.be/xrdgTA1jwBI (출처 Youtube)

▲ 미샤 마이스키가 연주한 '사랑의 길'. 들어본 풀랑크의 곡 중 가장 가곡적인 풍미가 가득한 곡이다.

 

마지막을 장식한 곡은 벤저민 브리튼의 첼로 소나타 C장조, Op.65 (Cello Sonata in C major, Op.65)이다.

20세기에 작곡된 첼로 곡 중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유명한 이 곡은 도입부에서 한번 이야기 꺼냈던 미샤 마이스키의 스승인 로스트로포비치를 위해 작곡된 곡이고, 실제로도 브리튼x로스트로포비치 조합으로 세상에 처음 선보여진 곡이다.

벤저민 브리튼은 영국 출신의 작곡가인데 나와 같은 비 전공자들은 그에 대해 접해볼 일이 크게 없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꽤나 난해한 곡이라고 말하겠다. 기교를 부린 듯 하면서도 보수적인듯한 곡을 들으며 어느새 나는 생각하기를 멈췄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듣기. 감상하기. 고기는 씹을수록 맛이 나고 음악은 들을수록 잘 들린다니 초심자는 묵묵히 들을게요.

 

https://youtu.be/OtnQfJk4rJw (출처 Youbute)

▲ 피아노엔 브리튼, 첼로에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 소나타 C장조, Op.65.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 두 대가의 협연을 들을 수 있단건 이 시대 우리의 특권이다.

 

 

미샤 마이스키의 공연의 또 다른 특징은 딸인 릴리 마이스키(Lily Maisky)와 함께 협연을 했단 것이다.

이번 2017년 내한 공연 말고도 수차례 딸의 반주에 맞춰 첼로를 연주하곤 했는데, 딸과 함께 한단 점은 실로 감탄사를 자아내게 했다.

가족과 일을 함께 한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서로에 대한 이해도도 높고 호흡도 비교적 수월하게 맞출 수 있단 장점은 분명 있을거다.

그치만 이건 단순히 가족끼리 연주하는 것이 아닌, 세계적으로 알려진 본인의 이름을 내 건 국제 리사이틀이다.

 

보통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협연하는 동료 음악가와 음악적 견해로, 또 감정적인 일로도 사소한 마찰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상대방이 가족이라면 이 경우 서로 표현하기도 애매하고 선뜻 화도 내기 어려운 난감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때는 나랑 함께 연주하는 사람이 내 피붙이라는 점이 되려 마이너스적인 요인으로 다가온다.

부모님과 잘 지내다가 사소한 일로 뜻밖의 장기 냉전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될 거다.
이런 점에서 10년이 넘도록 딸과 함께 협연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스킬이 필요한 일이고,

미샤 마이스키는 첼로를 다루는 솜씨만큼 가족들과의 관계를 조율해나가는 스킬도 탁월한 사람이란걸 시사해준다.

 

전 세계를 오가며 연주회를 가지는 빡빡한 스케줄 속에서도 늘 가족을 위한 시간을 내어주곤 한다는 미샤 마이스키를 그의 딸 릴리 마이스키는 '이 세상 최고 아버지'라고 부른다.

 

첼로의 음유시인, 첼로의 거장도 참 멋진 찬사지만 '최고의 아빠'라는 칭호는 더욱 아름답고 또 인간적인 정취를 물씬 풍기기에, 그의 연주에 더욱 귀 기울이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최고의 앵콜 매너를 보여준 미샤 마이스키와 릴리 마이스키(무려 4곡이나!!). Manners maketh man.

 

▲ 푸들미 뽐내며사인회까지 살뜰하게 챙겨주시고 떠난 미샤 마이스키님!! 개인적으로 얼마전 정경화 선생님과 함께 사인회를 하지 않아도 결코 서운해 하지 않았을 분이다.(결과적으로 두 분다 사인회를 진행하셨다! 짱짱맨 짱짱걸!) 70살의 나이에 이토록 열정적인 연주와 더불어 팬들이 사랑에 아낌없이 화답할 수 있단건, 그만큼 체력이나 마음가짐을 포함한 자기관리에 철저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존경스럽다.

 

▲ 사인회에선 짧게라도 꼭 몇 마디씩 나누곤 한다. 가급적 연주자 출신지의 언어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곤 하는데. 미샤 마이스키의 경우는 라트비아, 릴리 마이스키의 경우에는 프랑스 출신이었다. 러시아어나 불어를 못해서 그냥 영어로 연주 잘 들었다고 고맙다고 해따!

 

▲ 기다림의 끝에 겟한 미샤 마이스키님의 친필 사인! 아재의 머리카락만큼이나 꼬불꼬불한 글자당!!

 

가을엔 맛있는 것들이 참 많다. 전어도 있고 홍시도 있지만, 가을에 듣는 첼로 연주도 정말 맛깔난다.

누군가 가을에 가장 걸맞은 악기가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첼로라고 대답할 것이오,

가을에 들을 클래식 곡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망설임없이 오늘의 첼로곡들을 말할 것이다.

미샤 마이스키와 그의 손에서 탄생한 음률이 가득한 그 곳은 가을의 전설로 남을 만한 무대였다.

 

첼로의 선율 속에서 42년의 세월을 넘어 친구가 된 미샤 마이스키와 나.

왼손으론 현을 짚고 오른손으로 활을 긋는 동안 그는 어느덧 다다라 있었다. 뜻대로 행해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종심(從心)의 나이인 70세에.

한국 관객을 위해 한국가곡 '청산에 살리라'를 앵콜로 들려주는 모습에서 그 종심의 연륜이 물씬 배어났다.

마지막 연주곡의 끝음을 힘차게 그으며 감정에 복받쳐 벌떡 일어나는 모습에서 나 또한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연주하는 것이 바로 음악가의 원형이요 첼리스트의 법도요 또 첼로 그 자체일거다.

음유시인이라는 별호처럼, 100세까지 우리 곁에서 첼로의 음색으로 빚어진 시를 들려줄 수 있길.

딸과 함께 연주하는 아름다운 아버지의 모습을 그때도 볼 수 있길.

그리고 58살의 내가 다시금 그의 연주를 들으며 또 한 번 같이 기립할 수 있기를 바란다.

 

첼로, 가을, 그리고 가족.

초가을 저녁의 멋진 영화 한 편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