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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아트투어 김사자] 행복.3 정경화 선생님은 사랑입니다♥

처음 그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텅 빈 곳.
그녀가 오르자 비로소 꽉 찬 무대가 완성됐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사람마다 풍기는 아우라(Aura)라는 것이 있다. 기운, 분위기, 느낌 등으로도 불리곤 하는데, 정경화 선생님의 그것은 마치 큰 산과 같았다.
리사이틀 1부가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였기에 무대 위엔 어색할 정도로 아무것도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이윽고 무대 위에 정경화 선생님이 올라왔다. 활이 현에 닿는 순간, 그녀와 연주는 공간을 가득 채웠고 그 존재감은 좌중을 압도했다.
넓은 무대 위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설산(雪山)에 홀로 우뚝 솟은 고고한 산봉우리처럼 정말 거대해보였다.
아마 공연에 함께 한 모두가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지 않았을까 싶다.

 

1997년도 초등학교 1학년 시절, '정트리오'를 통해 정경화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되었다.
매달 구독하던 어린이 잡지에서 정경화, 정명화, 정명훈 남매에 대한 꽤나 긴 만화와 글을 읽게 되었고 당시 어린 나의 시각에서도 그들은 너무나 멋져 보였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2017년, 5미터도 채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서 정경화 선생님을 만나뵜고 연주도 듣게 되었다.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열린 이번 리사이틀의 대 주제는 '바흐'. 음악의 아버지인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중심으로 진행되기로 했었는데, 바흐 + 베토벤 + 브람스의 곡들로 구성이 변경되었고, 다시 바흐 + 드뷔시 + 브람스의 곡들로 최종 변경이 있었다. 왜 그렇게 바뀌었는지 공연주체측에서 설명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작은 아쉬움이 있었다만, 그래도 정경화 선생님이 연주하시는 곡들이었던지라 결과적으론 1도 불만없이 정말정말 좋았다 ㅎㅎ 

 

당초 예정됐었던 공연일은 5월이었다. 4월 초 쯤이었나? 정경화라는 이름 석자를 보자마자 눈이 반짝였고, 공연 티켓팅 시작하자마자 광속으로 예매를 했었다. 그만큼 두근두근 설레며 기대도 많이 했었는데.. 선생님 건강상의 문제로 8월로 연기가 되었더랬다. 아쉽기도 했지만 건강이 많이 편찮으신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정경화 선생님을 비롯한 음악가들은 미술가들과는 달리 작품이 고정적이거나 반영구적이지가 않다. 공연을 통해 매 회 만들어 나간다. 그렇다보니 리사이틀 한 번, 연주하는 곡 하나 하나 자체가 예술이요 마스터피스다. 연주자와 관객 모두가 연주를 대함에 있어 조심스러움을, 또 설렘을 느끼는 이유다.

 

본 공연에 앞서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에 대해 알아보는 미니 강의인 <공연 미리보기-Before the concert>에 참석했다.
30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선생님에 대해서 이모저모 알아볼 수 있는 값진 시간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도전과 시련,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Krystian Zimerman)과 같은 그녀 주변의 인물들, 또 '정트리오'를 길러낸 그녀 어머니의 교육방식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으며 뭔가 정경화 선생님을 이해하고 또 나 혼자나마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 대구콘서트하우스 챔버홀 뮤직카페에서 진행된 시간. 화면에 보이는 것은 1970년 11월 런던 심포니와 협연한 차이코프스키/시벨리우스 협주곡 음반. 1976년 뉴욕 에드가 레벤트리트 국제 콩쿨에서 당시 최고로 치부되던 핑커스 주커만과 공동 우승을 거두고, 1968년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 후 유명세를 떨치게 된 정경화 선생님이 더욱 국제적인 스타로 거듭난 계기가 된 나름 역사적인 유물?정도라고 할까나?


개인적으로 음악가나 공연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자리에 참석하는 기회를 꼭 잡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예술은 배우기보단 스스로 느껴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주의지만, 그래도 지식을 습득하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또 알게 되는 계기를 통해 또다른 것을 경험할 수 있기에. 



강의 후 드.디.어. 정경화 선생님의 연주를 감상하기 위해 공연장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제는 제법 익숙한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

다음 달엔 첼리스트 장한나씨의 세계무대 진출에 기여한 첼로의 거장 미샤 마이스키(Mischa Maisky)님의 공연이 있어 다시 찾게 되겠다. 벌써 공연 포스터도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 공연 시작 전. 리허설을 하셨는지 세워져있던 피아노가 공연이 시작되기 5분전쯤엔 치워졌다. 정경화 선생님이 올라오시기 전까지 무대 위는 운동장마냥 텅 비어 있게 되었다.

 

오늘 듣게 될 곡들에 대해 리플렛을 읽어보는 사이 서서히 조명이 약해지더니 이내 주위가 조용해진다.

이제야 시작인 것인가. 두둥!

본 글 만큼 긴 머릿글도 이제야 끝났다.

 

 

 


바이올린의 여제(女帝). 현(絃)의 여왕.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선생님을 지칭하는 단어다.
사실 이름 세 글자면 어디서든 통하는, 굳이 수식어가 필요없는 분이긴 하지만 여제 혹은 여왕이라는 찬사가 참 잘 어울린다. (외국에선 '현의 마녀'라고 부르기도 한다는데 영어로서의 Witch라는 뜻은 음악을 통해 홀릴정도로 witchy 스럽다는 의미다. 한국말로의 마녀라는 단어의 해석은 살짝 사악하다는 부정적인 느낌이 담길 수 있어서ㅎㅎ)

 

무대용 조명이 은은하게 비치고 모두가 오늘의 주인공의 등장을 기다리는 찰나, 

"안녕하세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입니다." 로 시작되는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녀 본인의 목소리로 직접 공연 중 관객들이 지켜주어야 할 수칙들을 몇 가지 알려준다.

이는 두 가지 의미로다가 입가에 미소를 맴돌게 했는데, 우선 클래식계 선배로서의 후배들에 대한 조언이랄까? 오늘의 자리가 클래식 공연 입문인 관객도 아마 있을 것이다. 공연 중 핸드폰 사용은 상식이 있다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겠지만, 악장 간 박수를 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었던 사람도 분명 있었을 거다. 행여나 관객들이 이를 모르고 실수를 할까봐 따뜻한 조언을 해주는 선배의 마음이 느껴졌다.

다음으로는 관객들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어떻게 보면 간단한 일이지만, 그녀와 같은 거장이 직접 공연 전 수칙을 말해준다는 것은 관객들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생각도 하지 못 할 법한 일이었다. 모두들 그녀를 마주하기 전에 먼저 마중나온 목소리를 들으며 반가움을 느끼고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에 좀 더 친근함을 느꼈을게다.


무대 위에 올라선 정경화 선생님은 바로 연주를 하지 않았다. 바이올린을 턱에 괴고 몇 초간 눈을 감고 멈추어섰다. 그리고 활을 들고 또 한 번. 뭔가 성스러운 의식을 치루는 느낌이었다. 매 공연마다 혼(魂)을 담아 연주하겠다는 결의인 것일까? 연주할 곡에게도, 관객에게도, 연주자 본인에게도 예를 표하는듯한 느낌에 절로 숙연해졌다.

 


공연의 1부는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바이올린 소타나와 파르티타로 구성됐다.

전공자가 아니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음악의 아버지' 바흐. 그의 음악의 정수로 불리는 곡들인 만큼 연주하기 어렵고 까다로운 곡들이라고 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Sonatas and Partitas for solo violoin, BWV 1001-1006)은 바흐에 의해 작곡된 세 곡의 소나타와 세 곡의 파르티타로 구성되어 있다. 바이올린의 모든 가능성을 구사하기 위해 작곡된 곡들로 단일 악기가 낼 수 있는 가장 폭 넓고 깊은 표현한 곡들이다. 특히 무반주로 진행되는만큼 연주자에게는 그만큼 부담감이 작용할 것이다.

 

연주자는 아니지만 상상이 된다. 아무도 그리고 아무 것도 없는 무대 위에 선 나. 앞엔 수많은 관객들이 자리하고 있다. 오로지 나 스스로와 손에 든 바이올린을 믿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매 순간 실시간으로 작품을 창조한다는 과정이 얼마나 떨릴까? 그렇지만 한편으론 또 정말 설렐 수 있을 것이다. 매 순간이 최고의 걸작을 만들어 낼 기회일 수도 있을테니까.

 

바흐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 1번 G단조, BWV 1001(Violin Sonata No.1 in G minor, BWV 1001)의 첫 악장을 듣자마자 소름!!!!

이어서 바이올린 파르티타 제 2번 D단조, BWV 1004(Violin Partita No.2 in D minor, BWV 1004)의 2차 폭격!!!! 심장 어택ㅜㅜ


무대 위와 공연장 곳곳을 가득 메운 바이올린의 음률과 정경화 선생님의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거의 반 홀린 상태로 앉아있었다. 이래서 마녀마녀 하는구나!싶었다. 흡사 피리부는 사나이를 따라간 쥐 격이었는데 그 중 젤 홀린 놈이 바로 나였을 듯..ㅎㅎ

 

https://youtu.be/1F7c8zIhBGg (출처: Youtube)

▲ 정경화 선생님이 연주하신 바흐의 바이올린 파르티타 제 2번 D단조, BWV 1004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마지막 악장 Chaconne를 한 번 들어보자. 고기는 씹을 수록 맛나고 음악은 들을수록 좋다.

 

참고로 소나타(Sonata)는 16세기 후반 경 만들어진 개념으로 보통 느린 악장-빠른 악장-느린 악장-빠른 악장의 4악장으로 구성된 실내 기악곡이다. 

파르티타(Partita)는 바로크 시대에 쓰인 음악형식으로 춤 곡 형식이라고 한다. 소나타와는 달리 대게 5~6악장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바흐의 곡들에는 기본적으로 종교적 색깔이 있는 편인데, 소나타 곡들엔 그 종교색이 짙은데 반해 파르티타에선 그래도 종교성을 살짝 뺀 세속적인 성격의 춤 곡 형식을 갖춘 것이 차이라고 한다. 

또, 바흐의 곡마다 붙어있는 BWV는 독일어인 Bach Werke Verzeichnis 로 1950년 볼프강 슈미더가 붙인 바흐 곡의 작품 번호라고 해.

주변 전공자들에게 물어물어 정리해봤는데, 곡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 됐음 좋겠다 :)


2부엔 미국출신의 피아니스트인 Kevin Kenner의 반주와 함께 드뷔시의 바이올린 소나타 G단조, CD 148; L.140

그리고 작년 클라라주미강&손열음 리사이틀에서 듣고 올해 앙상블 디토의 공연에서 들었던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제 3번, D단조, Op.108 이 이어졌다.

차이라면 정경화 선생님의 무대에선 여유가 느껴졌다. 마치 숙련된 연애고수가 밀당을 하는 것 처럼, 연주 중 얼굴에 한껏 미소를 머금었다가(진짜 개인적으론 연주 중에 웃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만큼 자신있고 숙련되었다는 증거겠지)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곡에 몰입하고 다시 몽환적인 표정을 짓곤 하시던, 정말 환상의 연주를 들려주셨다. 좌석도 꽤나 좋아서인지 불과 5미터도 채 안되는 거리에서 얼굴 표정과 손짓의 변화까지 하나하나 보며 들을 수 있었기에 더욱 기억에 남던 연주였다.

 

바이올린이 여왕으로 승승장구하던 정경화 선생님은 2005년,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된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열게 된다.

왼쪽 4번째 손가락을 다치게 되며 2007년에는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이어서 이화여대에서 석좌교수로서 후학양성을 진행하게 됐다.

이 경험을 통해 그녀가 인간적으로 그리고 음악적으로도 더욱 성장하게 되었음을 직감케한 인터뷰의 한 구절을 들어보자.

 

"부상 전엔 자신에 대해서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지 못했었어요. 그런데 부상 후에 마음을 접으니 '정경화라는 사람이 어떠했는지' 스스로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연주를 못해서 마음이 아픈 것이 아니라 지금 제 앞에 주어진 삶을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가 고민입니다." 

 

그리고 2011년 8월 손가락 재활치료를 마친 그녀는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들어보진 못했지만 이런 일들을 겪고 난 후의 연주는 아마 그 전과는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 차이가 긍정적일 수도, 혹은 듣는 이에 따라 부정적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긍정 쪽에 손을 번쩍 들어주고자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리고 삶에 대한 깊은 고민은 분명 인생에 형용할 수 없는 향기로움을 더해 준다. 이는 그녀의 두 손 끝이 맞닿은 바이올린과 그 음률을 통하여 우리에게도 전해지겠지.

 

2시간 동안 열정의 연주를 하신 후 팬들을 위한 사인회까지 진행하신 정경화 선생님. 적지 않은 나이에 연주하시느라 피곤하실텐데도 사인에, 사진도 같이 일일히 다 찍어주시고 너무 감동이었다. 공연 전/후로 3층 관객에게까지 손을 흔들어주시고 앞자리에 앉은 꼬마관객이 행여나 잘 못 볼까봐 연주 시작 전 위치를 매번 체크하며 아이컨택을 하던 세심한 모습을 통해 그녀가 오늘날 거장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친절한 경화씨와 김사자 with 암사자.jpg

 

작년 10월 11일 페이스북에 정경화 선생님이 연주하시는 바흐 무반주 파르티타를 듣고 싶다고 적어뒀었다.
딱 10개윌 뒤인 2017년 8월 12일, 그걸 이뤘다.


어느 신문 인터뷰에서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바이올린 지판을 짚으며, 손금도 잃어버리면서도 완벽을 추구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술은 완벽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그 사랑을 안고 무대에 오릅니다. 나의 무대엔 완벽이 아닌 사랑이 흐릅니다."

 

조선 후기 문장가인 저암(著庵) 유한준의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란 말이 문득 떠오른다. 완벽이라는 개념을 초월해 사랑이라는 이치까지 깨달은 그녀는 비로소 한 차원 높은 경지에 다다랐을 것이다.
평생을 음악과 함께했고 이젠 사랑을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화려한 경력을 넘어, 환상적인 연주와 그 선율을 넘어, 일평생 열정을 다해 연주하고 또 살아가는 인간 정경화의 모습이 정말 눈부셨다. 
앙코르 곡을 들으며 공연 중에 처음으로 눈물이 왈칵했다.
곧 맞이하게 될 그녀의 70년 음악인생에 진심을 담은 존경과 갈채를 보낸다. Brava! 정경화!

 

대충 지은 것 같아 보이지만 이번 글의 제목을 참 많이 고민했다.

연주를 마무리하시고 들어가시기 전 연신 하트를 날려주시던 선생님의 미소가, 사랑이 기조에 깔린 그 연주가 생각나며 드디어 정했다ㅎㅎ

 

그래, 사랑이다. 이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선생님이 경험하신 바와 같이 모든 것의 극의(極意)는 결국 사랑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그 분을 존경하는 내 마음도 결국 사랑일게다.

정경화 선생님은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