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일어나시죠. 12시까진 집에 가야 해서.."
과장님 말소리로 술 기운에 가물대던 눈이 번쩍 떠진다. 옆 자리 선배들이랑 눈이 마주쳤다. 눈 웃음 (^^) 역시 사원급은 하나다. 집에 가고 싶다. 아 집 가고 싶다.. 맘 속으로 몇 차레나 되뇌였는지 모르겠다. '집에 가죠'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뱉으면 안된다. 아니, 엿된다.
회식이 한창이다. 좌 청룡 우 백호가 아닌 좌 선배 우 팀장님. 내 오른손엔 고기 뒤집을 집게가 왼손엔 익으면 자를 가위가 들려있다. 경계 근무를 서는 군인처럼 고기를 예의주시한다. 절대 태우면 안된다. 타면 욕 먹는다. 불판 위 고기의 핏기는 사라져가는데 대신 내 눈이 충혈된다. 굽는 속도와 젓가락질 속도가 거의 비슷하다. 마트 시식코너 여사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여태껏 실례 참 많이도 했다.
집에서 계속 전화가 온다며 귀가하겠다는 분을 바로 아래 후배 과장님이 격하게 붙잡는다.
"선배가 무슨 신데렐라야? 가긴 어딜가!"
모두가 아는 동화 속의 신데렐라는 12시가 되면 마법에서 풀려난다. 휘황찬란한 드레스는 다 헤진 옷으로, 멋진 마차는 호박으로, 그리고 그녀의 시그니처 포인트인 반짝이는 유리구두는 낡아빠진 신발로 다시 변해버린다.
회식자리의 직장인들도 비슷한 상황을 겪는다. 단정히 차려입은 셔츠는 풀어 헤쳐지고 포마드로 샤프하게 빗어남긴 머리는 땀에 젖어 산발, 불 앞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다, 바지는 국물 자국에다 기름까지 튀어 엉망이다. 술기운에 옷이 찢어지거나 몸이나 안다치면 다행인거지.
알딸딸하니 이런 생각이 든다. 신데렐라가 우리 회식자리에 있었더라면 과연 제때 집에 갈 수 있었을까?
짐작건대 힘들었을거다. 유럽 어느 나라의 시민으로 추정되는 신데렐라 사원은 그 나라 파티장(회식자리)에선 자유로이 나올 수 있었을거다. 만일 그녀가 한국 회사원으로서 회식에 참석했더라면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을거다. 마법이 곧 풀릴거라는 개인적인 사정을 대봤자다.
결국 애써 걸어 놓은 마법이 다 풀려 다 떨어진 옷에 구멍 뚫린 양말을 신은 것도 잊은채 열심히 소맥이나 말고 있었겠지. 그때쯤이면 옆자리 상사들이 술에 취해서 마법이 풀린 사실도 모를 거란 추측 정도가 그나마 위안이겠지. '요즘 애들은 빈티지도 멋스럽네~ 껄껄^^'
회식(會食)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여러 사람이 모여 음식을 먹는 일'이다. 욕이 아닌 밥 먹는 자리다. 그치만 실제론 먹다 체하지만 않으면 선방이다. 어찌 그리 일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지.
누가 잘했니 못했니, 옆 팀은 실적이 어떻니 주고받다 결국 훈계시간이 된다. 꼭 누군가는 술이 오른 얼굴로 엄격 근엄 진지의 스피치를 한다. 그 와중에 고기는 타들어가고 있고, 막내인 나는 고기를 뒤집어야 할지 혼나는데 집중해야할지 내적갈등 중. 태우면 혼날 거 같고 또 혼내는데 딴 짓하긴 더 그렇고..ㅜㅜ
'단합을 위하여, 팀원간 소통을 위해 갖는다'는 명분을 필두로 애주가는 세상 혼자 살듯 술에 폭 젖고, 강요 안한다던 장려맨은 내 잔만 바라보고 있다.
"뭐하나! 옆 사람들 잔 빈거 안보이나?"
(.. 네 안 보였네요 고기 굽느라.)
정말 무서운 것은 번개맨들의 예고 없던 회식이다. 오늘 저녁 회식 장소 예약하라는 말이 훅 들어오면 기운이 쭉 빠진다. 몸이 좋지 않아 빠져도되겠냐며 조심스레 물어보면 돌아오는 건 혀차는 소리와 핀잔의 눈빛. 진단서 끊어오면 빼주시겠다는 말을 듣고 암이 나았습니다~
최근의 긍정적인 사회 트렌드로 점심회식이 등장했다. 옆 팀도 점심에 스테이크를 썰고 앞 팀도 호텔 부페 다녀왔단다. 탄산수에다 맛난 음식을 먹으며 하하호호 단합의 자리를 가졌단다. 세련된 회식을 했으면 좋겠다. 폭탄주를 돌리고, 건배사를 부르짖고, 고깃기름에 얼굴이 번들거리는 곳에서 밤을 지새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친목 도모할 수 있다.
술이 급 당기는 저녁, 쫄깃한 회 한 접시가 몹시 고픈 밤, 출출허니 괜히 옆 사원을 찔러본다. ‘광어회에 쏘주 한 잔, 깔끔하게, 콜?’ 제의는 하되 답변에 대해 아쉬워하진 말자. 괜히 눈치 주지 말자. 회사 후배들 보다야 더 오래 알고 지낸 동네 친구들과 마시는술이 더 편하진 않을지. 회식의 첫자가 모일 회(會)이니만큼, 모두가 행복한 마음으로 기꺼이 모일 수 있는 회식 그림이 가장 아릅답진 않을지.
한 때 유행한 가요 <신데렐라> 의 가사가 기억난다.
'나는 신데렐라 일낼라, 이때다 싶어 덤비지마요 큰일나요. 12시가 지나면 내가 널 어떻게 할지도 몰라 놔요, 잡지마요.'
신데렐라도 열두시면 집에 들어간다. 그 열두시도 본인이 원해서 남은 시간이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우리도 집에 가야겠다 싶으면 소신 있게 말하자. 그리고 적어도 그 날 안엔 귀가하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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