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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119 광팔이들의 시대

고스톱을 배웠다. '노름이 아니라 재밌는 놀이'라는 손에 이끌려서. 명절 할아버지 댁에서도 마다하던 걸 이제 와서 왜 배운진 모르겠지만 알려준다니 일단 앉아봤다. 기본적인 룰만 알면 금방 칠 수 있다더니 판이 몇 번 돌자 정말로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네 번째 판에선 꽤 크게 이기기도 했고.

 

여러 규칙 중 ‘광박’에 대한 내용이 인상적이었는데 누군가 끗수가 가장 높은 패인 광()으로 승점을 냈을 , 그걸 하나도 갖지 못한 사람은 돈을 배로 물도록 하는 규칙이다. 가진 자에게는 최고의 무기가 되고 없는 쪽은 가슴 졸이게 하는 이 광이라는 패는 심지어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 상황에서마저도 보탬을 준다. 공양미 삼백 석을 위해 인당수로 뛰어든 심청이와 비슷한 듯 다르게 우리 광이도 팔려가며.

 

 

 

 

기본적으로 세 명이 치는 게임인 화투. 그래서 넷이서 할 경우엔 선을 잡은 사람의 반시계 방향으로 참여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앞의 셋이 모두 하겠다면 마지막 인원은 어쩔 수 없이 빠져야 한다. 이때 그가 가진 패 중에 ‘광’이 있을 경우 혹시나 이길 수 있었을 판에 참여 못해 손해를 보는 격으로 여겨져 일정 액수의 돈을 보상받게 된다. 그걸 ‘광 판다’라고 표현한다.

 

타짜가 아닌 이상 광은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운이 좋아 획득했을 뿐인 이 패는 점잖게 슥 내미는 것만으로 공돈을 벌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한 수다. 회사에서도 우연찮게 ‘광’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늘 같은 족속들만 그런 패를 쥔다는 점에서 게임판과는 다르긴 하지만.

 

광 팔기. 사내에서의 그 명칭은 기존의 의미에서 살짝 달라졌는데 보통 별것 아닌 걸 대단한 모양새로 부풀려 대접받는 행위를 일컫는다. 과대 포장도 실력이라면 실력이랄 수 있겠지만 문제는 과도한 생색의 향연과 더불어 공동의 공을 개인이 독식해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거.

 

작은 건수라도 잡기만 하면 팍팍 티를 내는데 특화되어 있는 사람들. 복어처럼 몸을 부풀릴 줄 알고 꽃등에의 보호 무늬를 띈 그들은 집사를 간택하는 길고양이의 뻔뻔함까지 갖췄다. 모르는 척 손 안 대고 코 풀려는 시도가 잦아지다 거북스럽게 느껴지는 지경 이르면 그들은 비로소 이렇게 불린다. 광팔이 새끼들이라고.

 

 

밉살스러워하는 눈초리를 감내하면서까지 요리조리 제 몫을 챙겨나가는 광팔이들은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 살아 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몸짓을 보면 얄미운 와중에도 같은 월급쟁이 신세니 측은하기도 하다. 저 짓도 나름대로 힘들겠지. 꼼수를 동원해서라도 본인 존재를 증명하려는 생존 방식일 테니까.

 

짬 좀 되는 고 연차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광팔기가 사원들 사이에서도 등장하는 걸 보면 지금은 바야흐로 광팔이들의 시대인듯싶다. ‘있어 bility’를 지향하는 말 많고 발 빠른 이들이 득세하는 요즘. 묵묵히 하다 보면 내 가치를 언젠가 누군가는 알아주겠지 믿는 건 순진한 바보들 뿐이란다. 가만히 있는 사람만 광박을 때려 맞는 현실이다.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생활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가다가 정말로 혼자가 될 수도 있는 여긴 꽤 만만치 않은 곳이다. 광을 파는 건 바라지도 않고 그저 피박이라도 면하길 바라며 오늘도 회사라는 이름의 판에 앉는 선후배님들, 모쪼록 부디 5광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