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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115 채식만은 힘들겠지만 채식을 더 해보게요

친구가 홈짐을 차렸다기에 구경 갔다. 청파동 빌라 거실에는 어엿한 프리 웨이트 존이 형성돼 있었고 새로 들였다는 기구들을 만져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집 안에서 바벨에 원판 끼워 데드리프트를 할 수 있다니! 기가 막혔다. 방 안에서 밀리터리 프레스가 가능하다니! 코가 막혔다. 헬창들의 목표인 홈짐을 마련한 그는 꿈을 이룬 청년이었다.

 

팔짱 낀 채로 방문객들의 리액션을 감상하던 청파 GYM 관장님께선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더욱 기막힌 걸 보여주겠다고 했다.

 

 

 “쨘~ 이거 봐라.”

 “오~! 뭔데 이게?”

 “콩. 물에 불린 거. 병아리콩, 렌틸콩, 강낭콩 삼종 세트다.”

 “이야~! 콩! 근데 이걸 어따 쓰는데?”

 “먹어야지. 밥할 때도 넣고 샐러드에도 넣어 먹고.”

 

응~ 먹으려고 불리는 거라는 건 나도 알지. 단지 할머니도 엄마도 아닌 그 행동의 주체가 조금 낯설어서.

 

 

 

 

콩 대접 뒤에는 늙은 호박이 두 개 있었다. 쪄서 먹을 거란다. 냉장고엔 샐러리에 가지, 파프리카, 아보카도... 야채 가게인지, 요리 프로그램에 냉장고를 부탁하려고 채워둔 건지, 서른 살 남자 회사원의 부엌이라기엔 평범하진 않았다. 뭐든 하면 꽤나 전문가 뉘앙스로 진행하던 관장님. 그러고 보니 이 친구 얼마 전부터 채식을 시작하긴 했었다.

 

보름 전 캠핑장에서 삼겹살 구울 때도 관장님은 혼자 두부를 데워 우물댔었다. 거기 대고 ‘마! 안에서 고생 마이 했다! 두부 묵고 정신 차려라!’ 놀렸던 모두가 이젠 그의 행보를 사뭇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다. 식탁에 놓인 노란색 샐러드 도시락 통은 양손 가득 고기를 잡고 뜯던 예전 모습과 여전히 매치가 힘들긴 하지만.

 

홈짐과 콩 구경을 짧게 하고 관장님 기준에서 간단히 1시간 30분 정도 운동 후 광어회를 시켰다. 모이면 소고기를 굽거나 돼지고기를 시켜 단백질 보충을 했지만 요즘은 채식맨 배려 차원에서 두부나 버섯 혹은 물고기를 주식 삼고 있다. 두부 맛집을 찾아보겠다며 한 시간 반 걸려 미사리까지 갈 정도로 티를 팍팍 내주는 베이비 베지테리언과 친구란 이름 하에 뭉친 어중간한 채식주의자들의 일상기.

 

청파 체육관 관장님은 체질을 바꾸기 위해 채식을 시작했다. 기억하는 인생 시점부터 매끼를 고기와 함께 한 애육가였다만 건강 검진에서 피가 탁했다는 결과에 식습관을 바꿔보려고 했단다. 30년 동안 육식에 익숙해져 온 체질을 바꾸려면 다시 그만큼의 시간이 걸릴 거라는 관장님의 진중한 표정과 우정의 분위기에 휩쓸려 채식, 그 위대한 여정에 동참하겠노라고 결의의 잔을 치켜들었다.

 

 

이튿날 해장을 하러 냉장고 문을 열어 냉동 육개장을 꺼냈다. 전날의 채식주의자 선언이 기억나 냉장고를 연 채 한참을 고민했다. 그렇다고 이왕 사둔 걸 버리긴 좀 그래서, 있는 것까지만 먹기로 자체 타협했다. 괜히 눈치가 보여 야채 칸 속 양파를 반개나 썰어 넣기까지 했다.

 

원래대로라면 채식을 시작했어야 하는 토요일 오후. 이날따라 육수는 유독 진했고 안에 들어간 고기도 쫄깃했다. 나 역시 혈관 건강 걱정이 되긴 했으나 근 30년간 꾸준히 쌓아온 고기와의 우정을 단번에 날려버리는 건 너무 정 없다 싶었다. 차안으로 일단 그 관계는 그대로 둔 채 채식과 좀 더 가까워져 보기로 했다.

 

속을 풀어준 얼큰한 고기 국물 덕에 그쪽으로 마음이 살짝 쏠린 건 사실이지만 마늘과 대파도 들어가 있었으니 채식을 아예 외면한 건 아닐 거다. 육류와 채소가 적절한 조화를 이룬 건강식을 먹은 셈이지.

 

좋아 보인다고 당장 따라 하다간 되려 탈이 날 수 있다며 또 한 번 자체 타협했다. 급하게 한 다이어트엔 요요가 찾아오는 걸 보면 뭐든 차근차근해 나가야 한다는 게 만고불변의 정답일 테니까. 그래서 채식만은 힘들겠지만 채식을 조금씩 늘려보려는 결정을 내렸다.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 야채나 과일 위주의 식단으로 출발선을 끊어보기로. 굳이 이름 붙여보자면 간헐적… 채식?

 

국물에 밥까지 말아 떠먹으며 쇼핑 어플 카트에 부침용 두부와 애호박을 담는데 누가 메신저로 모 방송 캡처 사진을 보냈다. 직관적이면서도 위트 있는 노벨 문학상 감의 한 줄 문구였다.

 

‘고기를 먹지 않으면 오래 살 순 있지만 그렇다면 오래 살 이유가 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