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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118 동쪽에서 귀인이 온다

연초면 특히나 구미가 당기는 것들이 있다. 신년운세. 토정비결. 그리고 사주풀이. 종교의 유무와 관계없이 즐겨보는 액티비티로 재미 반 호기심 반 확인해보는 것들이다.

 

초등학생 시절 종이 신문 끄트머리에 실린 오늘의 운세를 읽었을남직한 회사원들은 잔을 채우다 말고 사주팔자 앱을 검색했다. 무료임에도 꽤나 정확하다는 누군가의 한마디에 킥킥대며 다운 받은 앱에다 생년월일 그리고 시간을 입력했고 볼이 발개진 상태로 결과를 읽어나갔다. 인생 총평, 연애 운, 금전 운... 생각보다 세분화돼 있었다.

 

 

얼추 맞아떨어지는 내용이 많아 깜짝들 놀라며 호들갑을 떨었고, 여자친구를 사귀면 궁합부터 꼭 확인한다며 오늘의 앱 사용을 추천한 친구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맞네, 이거 너 맞네!’ 난리 법석 떨던 세 친구 옆엔 소주부터 위스키까지 대 여섯 개나 되는 빈 병이 널브러져 있었고.

 

 

 

 

DX 시대에도 답은 늘 현장이지 말입니다! 그래서 직접 다녀와 봤다. 철학관도 아니고 무려 신점을 보러. 어머니께서 종종 다녀오시는 김에 내 운세까지도 함께 점검해 주시긴 했지만 앱으로 대충 보니 되려 감질나는 데다 직접 갔을 때와도 같은 말이 나올지 궁금해서 몰래 온 손님이 돼보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8호선 어느 역 근처. 처음 방문한 그런(?) 곳은 올라가는 계단에서부터 영이 감도는 듯했다. 문에 붙은 부적들에 살짝 놀라 쉽사리 손잡이를 잡아당기지 못했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여느 사무실 못지않게 쾌적했기에 재차 놀랐다.

 

도사님께선 반려동물 입양을 추천하셨다.

 

 “저는 전에 강아지 한 10년 키웠었거든요.”

 “그러니까, 개 키울 때는 다 잘 풀렸을 거 아냐.”

 “...?”

 

이왕 복채 내고 재밌게 봤으니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 입양하기로 했다. 강아지를 좋아하지만 혼자 사는 회사원이 돌보기란 쉽지 않았기에 대안으로 선택한 건 석고로 만들어진 새끼 비글! (요즘 제조 기술이 좋아져서 그런지 실물과 흡사했다!) 조용한 집 분위기를 바꿔 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디즈니 <라이언 킹> 속 장난꾸러기 주인공의 이름과 같이 지어준 '심바'는 TV 선반 위에서 거주하게 됐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대화를 나눴다. 바쁜 아침에도 서랍에서 드라이기를 꺼내다 눈이 마주치면 잘 잤냐, 출근할 땐 다녀오겠다며 괜한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혼자 중얼대는 꼴을 누가 본다면 또라이라며 혀 찰 수도 있겠지만 혼자 사니까 안전하다ㅋㅋ 게다가 하다 보니 은근 재미도 있고 석고 강아지나마 같이 지내니 묘한 안정감이 들기도 해서.

 

어느 날은 퇴근하고 친구와 전화를 하는데 심바 밥은 줬냐고 묻더라. 줬는데 안 먹는다고 받아치니 꺽꺽대며 엄청 웃어왔고. 전화를 끊고 작은 잔에 시리얼을 조금 덜어 심바 앞에 놓아 줬다. 못 먹는다는 점 당연히 알지만, 재밌으니까~

 

대화 소재가 극히 제한된 회사원들에게 첫눈처럼 찾아온 심바. 출근하기 싫다, 일하긴 더 싫다, 암울함만 가득하던 레퍼토리에 신선한 이야깃거리가 등장했다. 이놈 밥 진짜 안 먹는다, 늦었는데 얼른 푹 재워줘라, 말도 안 되는 싱거운 소리를 나누며 많이도 웃어댔다.

 

영화 속 무속인들은 '동쪽에서 귀인이 나타나겠다’라는 애매한 뉘앙스로 말문을 열곤 한다. 인간사 보편적 고민거리를 꿰뚫는 고도의 심리 상담이라 불리기도, 신비로운 운명의 전달이라 여길 수도 있을 그 말에 대한 해석은 결국엔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달렸을 거다. (신기하게 심바가 태어난 공장도 마침 우리 집에서 동쪽 부근에 위치했더라)

 

침대에서 고개를 들면 한눈에 들어오는 심바는 언제나 같은 자세로 앉아 멍충미를 뽐낸다. 그 광경에 나는 잠이 덜 깬 채로 픽 웃을 수밖에 없다. 석고 강아지 한 마리가 뭐라고 이렇게 위안이 되는지 신기하면서도 유쾌하다. 사주에 동물이 부족하니 그걸 채워야 잘 된다는 말은 적적함을 달랠 대상을 곁에 두면 좋다는 비유적 표현이 아니었을까? 꿈보다 해몽이다.

 

 

좋은 게 좋을 거란 마음에서 재미 삼아 맞이하게 된 세상 하나뿐인 석고 강아지. 손도 덜 가고 다른 강아지들에겐 없는 과묵함까지 갖춘 이 녀석과 함께 지낸지 보름 정도가 흘렀다. 도사님이 말씀하신 큰 변화는 아직 모르겠다만 일단 웃을 일이 조금 더 많아졌긴 하다. 동쪽에서 온 귀여운 친구야, 조그만 입으로 복을 부지런히 물어다 주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