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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113 기꺼이 저녁밥을 짓는 마음

깨끗이 손 씻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두부 한 모, 팽이 버섯 한 봉지, 청홍고추 각 하나씩, 깐 마늘 일곱 알에, 대파 반대, 찌개용 돼지 목살 200g, 그리고 묵은 김치. 

 

꺼낸 고기에 칼집을 살살 내어 생강가루로 잡내를 잡고 소금이랑 후추로 밑간을 했다. 전골용 냄비에 올리브기름을 둘러 설렁설렁 볶는다. 메조 포르테의 속도로 지글대는 소리에 반해 안단테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내 손. 이젠 불을 살짝 줄이고 두부와 버섯을 숭덩숭덩, 파랑 고추를 어슷하게 송송 썰기. 중식 셰프처럼 마늘을 칼로 탕 내리쳐서 한방에 빻고 싶었는데 잘 안되는 건 아마도 장비 차이인가 봐.

 

김치를 참기름에 살짝 버무려서 냄비에 투여해 함께 볶다가 물 두 컵, 간 마늘 한 술. 간장과 고춧가루도 한 숟갈씩 넣어줬다. 이제부턴 내 실력으론 레시피를 정량화할 수 없는 국물 맛 내는 구간. 간을 본다며 떠 먹길 수 번, 그리고 그만큼 다시 이것저것을 넣다 보면 그럭저럭 먹어줄 순 있는 맛이 나온다. 반듯하게 썰어둔 두부와 버섯을 넣고 마지막으로 고추를 가니쉬처럼 얹으면 자취생 김치찌개가 완성된다. 급히 하진 않았지만 할 때마다 속도가 붙는 것이 이것도 일이라고 숙련도가 쌓이나 보다.

 

 

 

 

요리하는 새 집안에 훈기가 돌기 시작했다. 조그만 부엌에 보글대는 소리와 밥 짓는 냄새가 모락모락 퍼질 땐 안도감마저 든다.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가 기본으로 깔리고 팀장님의 부름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던 바쁜 세상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조용한 가운데 들려오는 찌개 끓어가는 소리는 종일 쌓인 긴장감을 조금씩 덜어준다.

 

저녁 9시 30분. 갓 끓인 김치찌개 한 그릇에 김, 쭈꾸미 발처럼 칼집을 낸 비엔나소시지, 진미채, 콩자반이 놓인 소박한 밥상 앞에 앉았다. 따끈한 밥 한술과 국물 한입에 온몸이 덥혀진다. 오늘도 고생했어- 위로받는 듯한 소소하고 소중한 하루의 마무리다. 

 

야근 날의 퇴근길에선 유독 배가 고파온다. 몸과 마음이 지친 와중 울려대는 꼬르륵 소리에 배달 어플에 몇 번이나 손도 갔다. 그렇게 도착한 집에서 참 번거롭게도 재료를 손질하고 지지고 볶아내 기어이 한상을 차려낸다.

 

밥을 차린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요리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있는 재료를 활용해서 어떤 걸 해 먹을지 고민하고 드는 시간이나 노력을 생각해본다면 분명 귀찮은 게 맞다. 더군다나 종일 노동하다 퇴근한 직장인들에겐 더욱. 

 

 

누구를 위한 하루였는지 뒤숭숭해오는 퇴근 후, 저녁밥을 차리는 하루 끝에서야 비로소 나만을 위한 일과를 시작한다. 저녁밥 짓기. 내가 먹을 한 끼만을 위해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 그렇게 굳이 번거로워지는 길을 선택하게 됐다. 서툴게나마 차리는 밥상은 나를 위해 '기꺼이' 귀찮아지겠다는 마음이니까.

 

레시피를 찾아보고 국자를 달그락 대보는 정성은 수고한 나를 위해 기꺼이 귀찮음을 감내하겠다는 애정의 한 갈래지 싶다. 손수 손질한 재료로 끓여낸 국물을 후루룩 마실 때면 가슴속까지 충만해지는 느낌이 든다. 이건 마치 영혼을 달래는 닭고기 수프?

 

‘빠르게, 더 빠르게’가 미덕이 되는 하루를 보내다 비로소 여유로이 밥 짓는 시간을 맞았다. 고기에 칼집을 내 밑간까지 하고 소스를 만들고 느긋히 볶는 이 순간이 너무 좋다. 원한다면 한 시간을 이러고 있어도 뭐라 할 사람 없고 별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거다. (고기가 질겨진다는 아주 큰 문제가 발생할 수는 있겠다...ㅎ)

 

퇴근하고 할 일은 저녁밥 지어 먹기. 배달 음식에 반가공 식품이 넘치는 좋은 시대에 눈물 흘리며 양파를 까고 파를 다듬으면서 유난스럽게도 밥 해 먹는 사람들이 있다.

 

별을 보며 퇴근한 밤, 기꺼이 저녁밥을 지었고 더없이 맛있게 먹었다. 

 

끝.